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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과 준법 감시

by 김종현

‘물론 법 지켜야죠. 그런데 때론 잔인하다 싶을 정도로 법이 앞을 가로막을 때가 있어요. 규제 샌드박스처럼 완화하는 제도가 있지만 콩고물 수준이에요. 답답하죠 때론.’


얼마 전 국내 모 대기업 관계자와 점심미팅을 하던 중 나온 말이다. 기존 주력으로 하던 분야가 아닌 새로운 분야에 진출하려 하는데 법과 규제가 앞을 가로막고 있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현 정부가 규제 샌드박스 활성화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지 않냐고 물으니 ‘지금은 탄핵 때문에 묻혔다. 정국이 안정되고 나서 봐야하지 않을까 한다’며 말끝을 흐렸다. 해당 대기업이 진출하려는 분야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시장 규모가 커지고 있는 미래 유망 산업군이다. 해마다 파이가 늘고 있어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견기업도 눈독을 들이고 있다.


기업은 국가에 있어 중요한 경제 구성원이다.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받아들이고 내수가 아닌 대외수출비중이 월등히 높은 우리나라에선 그 존재가 막강할 만큼 너무나 중요하다. 삼성전자가 만들어 파는 반도체는 ‘산업의 쌀’로 불릴 만큼 국가를 먹여살리는 존재로 인식된다.



이들의 역할이 너무 중요하다 보니 불과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법의 테두리 안에서 일하고 있는지’, ‘부정부패, 분식회계를 저지르지 않고 있는지’보다 ‘어떻게 하면 몸집을 더 불릴 수 있는지’, ‘국제시장서 존재를 어떻게 더 키울 수 있는지’가 더 중요하게 여겨졌다. 법과 행정 절차는 나중에였다. 최일선에서 땀과 피를 흘리며 제품을 생산하는 노동자의 권리는 당연히 무시됐다.


박정희 정부 주재로 경제개발계획이 추진될 1960년대 당시 우리나라는 ‘기업이 커야 나라가 큰다’는 표어가 있을 만큼 기업 키우기에 혈안이 돼 있었다. 국내 철강업계 1위 기업 포스코 전신 포항제철은 일본의 식민지 배상금으로 제철소를 지었다.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일본의 오히라 외무상을 만나 밀약 각서를 쓰며 받아낸 배상금은 처절하다 못해 안타까운 당시 우리나라 현실을 그대로 보여줬다. 식민지배에 대한 반성과 사과 대신 ‘독립축하금’ 명목으로 돈을 받았다.


일본과 국교 수립 전 해당 내용이 국내에도 알려지자 학생을 비롯한 시민들은 굴욕적 회담에 반발하며 한일 국교 수립 반대 시위를 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계엄령을 선포하며 맞섰지만 한편으론 국민을 달랠 메시지도 밝혔다.


한일 수교 직전 박정희 대통령은 담화를 통해 ‘우국충정에 불탄 학생들이 나라를 걱정하는 마음으로 시위에 나선 그 마음을 나도 이해하고도 충분히 남음이 있다. 나는 한일 회담이 성공이 되든 결렬이 되든 종결을 짓게 되면 과연 나의 결심이 애국적인 것인가 아닌가를 국민에게 물어볼 작정이다’고 말했다. 무슨 마음에서 시위를 나왔는지 알고 이해하지만 경제적으로 가난한 현실을 냉정하게 봐야 한단 말이었다.


이렇게 처절하게 받은 돈으로 짓는 제철소인 만큼 포항제철 경영진은 생즉사 사즉생의 마음으로 제철소 건립에 나섰다. 박태준 당시 포항제철 사장은 제철소 건립 전 전 직원을 영일만 모래벌판에 모아놓고 ‘이 돈은 우리 조상들의 핏값이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영일만에 빠져 죽자’고 말했다. 마지막 기회라는 심정으로 모든 역량을 집중시켜 사업을 성공시켜야 한단 말이었다.



물론 이때는 우리나라가 정말 가난한, 보릿고개 넘기는 게 힘든 1960~70년대다. 매 끼니 먹을 걱정을 해야 하고 학비가 없어 공부를 못하는 처절한 현실이 눈앞에 펼쳐진 시대였다.


이후 한강의 기적을 이루고 연평균 국민소득이 1만 달러를 넘으며 고소득 국가 반열에 오른 우리나라는 올림픽, 월드컵 등 굵직한 스포츠 대회를 개최할 만큼 경제적 여유를 갖게 됐다. 아이러니한 건 이때 기업에 대한 감시의 필요성이 제기됐단 것이다.


노동자 인권이 철저히 무시되고 기업이 어떤 갑질을 해도 정부가 귀를 닫았던 시대가 아닌 연소득 1만 달러를 넘어선 때에 ‘기업이 법을 제대로 지키며 사업을 벌이는지, 정부가 규제에 나서야 하는 건 아닌지’를 봐야 한단 목소리가 나왔다.


YH무역 노동자 사건, 전태일 분신 사건 등 밤낮 가리지 않고 제품을 생산한 노동자들이 기본권을 요구하며 목숨을 건 투쟁을 이어간 시대가 아니었다.


발단은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였다. 우리나라 정부는 이때까지 기업이 어떤 분야서 사업을 하든 규제·감시하지 않고 대부분 허용해 줬다. 특정 산업군에 너무 많은 기업이 발을 뻗는 중첩 현상이 나타날 때도 정부는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아무리 우리나라가 당시 연소득 1만 달러를 넘기고 부유해졌다 해도 국내 시장 파이는 한정돼 있었다. 이마저도 현금 등 보유한 유동성 자산이 아닌 금융기관 등지서 빌려온 자금으로 무분별하게 벌렸다.


이 때문에 한때 재계 순위 14위에 랭크됐던 한보그룹이 빚을 감당하지 못하고 무너지자 다른 대기업들이 연거푸 쓰러졌다. 도미노처럼. 체면, 명분, 노동자 권리 모두를 포기하며 얻은 경제적 부를 한순간 방심으로 잃게 된 것이다. 1997년 우리나라 외환 보유고를 본 미셸 캉드쉬 IMF 총재는 잔인할 정도로 이 점을 정확히 꼬집었다.


‘한국은 눈앞의 위기를 애써 외면하려 한다.’


현금 등 유동성 자산 곳간을 채우지 않고 기술 등 사업 경쟁력 확보 대신 외형 확장에만 골몰한 한국 기업과 경제계를 향해 직격탄을 날린 것이다. 외형을 키우기 전에 그만한 자산과 경쟁력을 충분히 갖췄는지 돌아봐야 했지만 이를 지적할 정부와 기관은 손을 놓고 있었다.


[사진출처=픽사베이]


우리나라에 기업 준법 감시 필요성이 다시 대두된 건 2019년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당시 부회장)이 국정농단 뇌물공여 횡령 혐의로 재판을 받았을 때였다. 당시 이 회장은 대법원 파기환송으로 서울고등법원서 재판을 받았다.


당시 재판을 담당한 판사는 이 회장에게 ‘준법감시제도 마련’을 주문했다. 이 회장은 이에 응했고 이듬해 초 준법감시위원회를 출범시켰다. 초대 위원장으로 진보 성향 김지형 전 대법관을 선임했다.


삼성 준법감시위원회는 2020년 3월 이 회장에 ‘불투명한 경영권 승계에 대해 국민에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3개월 뒤 이 회장은 삼성 출입기자단이 보는 앞에서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했다.


굳은 표정으로 기자단 앞에 선 이 회장은 ‘오늘의 삼성은 글로벌 일류기업으로 성장했습니다. 국민의 기대와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국민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습니다. 때로는 실망을 안겨드리기도 했습니다. 법과 윤리를 엄격하게 준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사회와 소통하고 공감하는 데에도 부족함이 있었습니다.’며 고개를 숙였다.


초대 회장 고 이병철 삼성 회장때부터 이어져 온 자녀승계도 포기하겠단 입장을 내비쳤다. 이 회장은 ‘저는 제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제 자신이 제대로 평가도 받기 전에 승계를 언급하는 것이 무책임한 일이라고 판단해서기 때문입니다’며 연신 고개를 숙이며 용서를 구했다.


사회 반응은 냉담했다. 재판부는 ‘삼성 준법감시위원회 활동이 실효성을 충족했다 보기 어렵다. 진정성은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기준에 충족하지 않는 이상 양형 조건으로 참작하는 건 적절치 않다’며 이 회장에게 징역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이 회장은 법정 구속됐고 사면되기 전까지 353일간 교도소서 복역했다.



기업에 있어 준법 감시는 양날의 검과도 같다. 사업 확장과 신사업 진출에 걸림돌로 작용해 국가경쟁력 발전에 마이너스로 작용할 수 있지만 사업 중첩과 노동자 기본권 침해 등 돌이킬 수 없는 손해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삼성을 비롯한 국내 대기업도 준법 감시 기구를 만들고 있다. 카카오의 준법과 신뢰 위원회도 그 일환이다. 초반엔 ‘모기업에 솜방망이 권고만 내린다’는 비판을 들었지만 최근엔 준법시스템 고도화와 준법 경영 체계 마련에 나서는 등 적극 행동에 나서고 있다.


사법부나 정부·기관이 반강제로 만들라는 압박을 줘 만드는 경우가 많지만 기업도 이를 무시하지 않고 비용을 들여 만들고 전문가 선임에 나서는 등 협조하는 태도를 많이 보이고 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은 멀다. 국내 주요 대기업들은 삼성과 카카오만큼의 준법 감시 기구를 마련하지 않고 있다. 특정한 사건이 있어 사법부나 정부·기관이 만들라는 압력을 넣지 않는 이상 구축하려는 노력도 보이지 않고 있다.


물론 기업의 최우선 가치는 이익과 돈이다. 돈이 없으면 망하고 뿔뿔이 흩어져야 하는 존재가 기업이다. 생존과 직결됐기에 기업이 이익을 추구하는 건 누구도 뭐라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행위가 다른 기업 혹은 노동자의 권익을 침해하지 않는지, 국내 산업군 전체의 손실로 이어질 만큼 거시적 부문서 실이 되지 않는지, 공정거래 자율준수 문화를 해치진 않는지 감시하고 지적하는 건 반드시 해야 한다.


21세기 아니 22세기 대한민국에 제2의 IMF 사태가, 국민과 사랑과 관심을 받으며 큰 기업이 미래 산업·기술 육성에 투자해야 할 돈을 권력자의 사적 이익을 위해 사용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게 하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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