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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Karl Oct 30. 2022

17. 플로라 맥도널드의 일생

1.

아침부터 캠핑장 앞 도로는 아스팔트 공사로 분주하다. 작업자 한 명이 정성스럽게 우리 차의 안전을 지시한다. 그런데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도로에는 우리 뿐이다. 스카이섬은 제주도 정도 크기다. 거기에 제주도 인구 60분의 1이 산다. 게다가 캠핑장은 섬 끄트머리에 있다. 근방에는 외딴 집 조차도 없다. 결론은 우리 같은 사람 말고 아침에 이곳을 지날 차량은 거의 없다. 


첫 방문지는 우그 포터리Uig pottery다. 캠핑장에서 30분 거리다. 날개깃 사이로 바다가 치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5분이면 닿을 거리다. 우그 포터리가 2마일 남았다는 이정표 뒤로 우그 포터리가 가깝게 보인다. 트레킹하는 남녀가 원경에 마을을 담고 사진을 찍는다. 맑은 하늘에 낮고 날렵한 구름이 우유처럼 하얗다. 해안가 구릉 위로 집들이 듬성듬성 꽂혀 있다.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하얀 벽체에 까만 지붕을 덮었다. 


작은 항구에 차를 세운다. 노인과 청년이 탄 낡은 배 한 척이 선착장으로 들어온다. 노인과 우리 아이들이 거의 동시에 서로를 향해 손을 흔든다. 정겹다. 항구와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대리석 기념비는 1902년 에드워드7세와 알렉산드라 왕비가 방문한 것을 기념하는 것이다. 왕이나 여왕 방문을 기념하는 이런 증표들은 영국 곳곳에 참 많다. 내가 목격한 대부분은 엘리자베스 여왕의 것이었다. 왕의 것은 처음 본다. 


도자기 전시장을 찾는다. 스코틀랜드 도자기도 꽤 유명하다. 여기 작품들은 영국 도자기 도시로 불리는 스톡온트렌트에서 봤던 것들과는 결이 다르다. 그곳이 전통적이라면, 여기는 대담하면서 모던하다. 스코틀랜드만의 특징인지, 차별화의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위대한 글렌의 길에서 만났던 해미쉬를 빚은 도자기 작품에 유독 눈길이 간다. 진취적이고 호방하며 귀엽기까지 하다. 게다가 디테일이 대단하다. 만지작거리기만 하다가 결국 돌아선다. 상처없이 요크까지 데려갈 자신이 없다. 


2.

A87에서 A855도로로 차를 몬다. 포트 아우구스투스에서 시작한 A87국도는 위그 포트리에서 끝난다. 해안을 버리고 숲을 선택한 작은 길을 한동안 달린다. 그리고 다시 바다와 만난다. 바다 건너 육지가 아득하게 보인다. 넓고 푸른 잔디밭 너머로 더 넓고 더 푸른 바다가 독특한 공간감을 연출한다. 하늘과 구름도 완벽하다. 자동차를 따라 색채의 깊이와 형태가 달라진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움직이는 회화다. 


초원 위로 가끔 등장하는 작은 집들 덕분에 풍경이 바뀌고 있다는 걸 깨닫는다. 갑자기 초가집을 닮은 소박한 집들이 무리 지어 나타난다. 집들 사이사이로 자연에는 없는 초록색과 주황색 기구들이 들판에 널려 있다. 강렬한 컬러 덕분에 여기가 스카이 뮤지움Skye Museum인 걸 알아챈다. 포트리 안내 책자에서 본 그대로다. 도로 옆 작은 나무 간판 옆에 차를 멈춘다. 


스카이 뮤지움은 노천박물관이다. 100여년 전 스카이섬 고유의 생활사를 노천에 펼쳐 놓고 보여준다. 전통 가옥은 악천후에 맞서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으로 진화했다. 주변에서 쉽게 구하는 돌로 낮고 두텁게 외벽을 세웠다. 지붕은 과하다 싶을 만큼 억새를 겹겹이 쌓아 얹었다. 유난히 작은 창문은 밖을 살피는 용도 외에 다른 기능은 전혀 없다. 내부는 단순함 그 자체다. 마치 동굴 속 같다. 


제임스 보스웰James Boswell은 1773년 스카이섬을 방문하고 이런 회고를 남겼다. ‘스카이섬 사람들은 집에 관한한 잠자는 장소 외에 어떤 것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다. 대부분 밖에서 시간을 보내고, 세속적인 소유물이나 사치 따위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집은 쉼이라는 오래된 아파트 광고 카피를 빌자면, 스카이섬에서 집은 안전이다. 혹한과 최악의 강풍을 견디는 것, 그 이상은 이들에게 사치였다. 거의 은신처에 가깝다. 


3.

박물관 너머 언덕에 박물관보다 많은 사람이 모여 있다. 산책하듯 오른 언덕에는 묘지의 행렬이 끝이 없다. 넘실대는 바다로 향한 모양이 휫비를 연상시킨다. 그럼에도 거기와는 전혀 다르다. 여기는 스산함 대신 모던과 정갈함을 택했다. 땅에 묻힌 사람만큼 다양한 묘지 형태도 이채롭다. 그 중, 가장 크고 화려한 묘비 앞에 선다. 무덤 주인은 플로라 맥도날드Flora Mactonald다. 어디선가 들어본 듯한 이름 아래엔 ‘찰스 왕자의 수호자Preserver of Prince Charles Edward Stuart’라고 적어 놓아 놓았다. 


이야기는 대충 이렇다. 쿨로덴 전투에서 완패한 찰스 왕자는 스카이섬으로 숨어 든다. 거기서 플로라의 도움으로 스코틀랜드를 무사히 빠져나간다. 이후 플로라는 이 일로 고초를 겪는다. 잉글랜드는 찰스 왕자가 프랑스로 도망가는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플로라를 지목했기 때문이다. 런던으로 끌려가 런던탑에 갇힌다. 어렵게 풀려난 이후에도 그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가 1709년에 숨을 거둔다. 


당시 잉글랜드는 무관용 정책으로 스코틀랜드를 탄압했다. 자코바이트의 흔적을 지우는 것이라면 모든 것이 허용되던 때였다. 그럼에도 그녀의 장례식에는 3000명이 넘는 조문객이 몰려들었다. 스코틀랜드 사람들에게 플로라는 자코바이트 역사의 영웅이자 하나의 상징이 되었다. 그녀의 이야기는 책(<플로라 맥도널드의 일생Life of Flora MacDonald>(1882))으로도 출판되었다. 


인버네스 성에서 봤던 동상 하나가 번쩍하며 떠오른다. 네스 강을 굽어보고 있었고, 지나치게 크고 화려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기념비 같은 화려한 묘비에서 느꼈던 궁금증을 그때도 똑같이 느꼈었다. 그녀의 이름이 낯설지 않았던 까닭이다. 플로라 맥도널드를 생각하는 스코틀랜드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은 알겠다. 바닷가 공동묘지를 잠깐 더 배회하다가 차가 있는 곳을 향한다. 


4.

앞서 가던 준서가 화장실을 찾는다. 길가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화장실로 아들을 들여보낸다. 혼자 남은 나는 화장실 입구에 걸린 안내문을 습관처럼 읽는다. ‘카운실Council은 더 이상 이 화장실을 지원할 수 없다. 화장실을 유지하려면, 사용자 한 사람이 적어도 40페니를 후원해야 한다. 한해 운영비는 5000파운드를 상회할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이 비용을 충당하지 못하면, 화장실은 영원히 폐쇄된다. 제발 아래에 있는 박스에 후원금을 넣어 달라.’ 


내용이 너무 절절하다. 문구를 읽지 않았다면 모를까 읽고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는 문장이다. 이렇게 짧은 글이 그렇게 설득적일 수가 없다. 무려 1파운드를 쾌척한다. 다시 읽어봐도 군더더기 하나 없는 솔직한 글이다. 진솔한 고백은 마음을 움직이는 최선의 방책이다. 준서가 화장실을 나온다. 기분이 좋아져 다시 앞서 뛰어간다. 


스카이섬 북쪽으로 차를 몬다. 던툴름 성Duntulm Castle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본다. 위도상으로 이곳은 섬의 북쪽 끝이다. 우리보다 먼저 온 많은 차들이 도로를 점령해 있다. 도로 안쪽 빈 곳에 차를 주차한다. 도로에서 바라본 절벽 위엔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 해안 절벽 뒤에 숨은 멋진 성을 상상하며 절벽을 오른다. 드디어 꼭대기다. 그래도 성은 없다. 몇 개 돌무더기가 전부인 옛터만 남았다.   


바다로 튀어나간 전망 좋은 자리에 처음 던툴름 성을 지은 것은 14세기였다. 하지만 바람 잘 날이 없었다. 맥도날드Macdonald와 맥레오드MacLeod 집안이 성을 놓고 오랜 세월 피 터지게 싸웠다. 17세기에 이르러서야 공식적으로 맥도날드 집안 소유가 된다. 그러나 1732년, 자코바이트 사건으로 성은 버려진다. 훗날 맥도날드 가문 사람인 알렉산더가 남쪽으로 5마일 떨어진 곳에 몽크슈타트 하우스를 지으면서, 던툴름 성에 쓰인 상당한 돌을 건축 재료로 가져가 버린다. 돌무더기 하나에 놓인 던툴름 호텔을 광고하는 작은 입간판이 오늘 던툴름 성 위상을 대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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