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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Karl Oct 30. 2022

15. 놀이로 운하를 배운다

1.

붉은 빛 인버네스 성이 언덕 끝에 자리를 잡았다. 자코바이트 봉기 때 파괴된 것을 19세기에 복원한 성은 지금 법원으로 쓰인다. 여기에 처음 성을 지은 것은 11세기다. 천년 전에 누군가 이곳에 터를 잡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뷰포인트에 서면 금방 알 수 있다. 네스Ness 호에서 빠져나온 강줄기가 인버네스를 감싸 돌아 북해에 이르는 광경이 눈부시다. 


드디어 인버네스다. 하루 종일 대자연 속에 있다가 만나는 깔끔한 집과 거리가 반갑다. 푸근한 마음이 든다. 내가 사는 요크와 비슷한 듯 다르다. 아마도 시내를 가르는 네스 강의 넓은 강폭 탓이다. 강줄기를 따라 시선을 옮기다 보면, ‘네스의 입구’라는 뜻을 가진 인버네스라는 작명이 얼마나 직관적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인버네스는 너무 예쁘고 경쾌한 마을이다. 네스 호 괴물, 네시Nessie만 떠올리던 때와는 완전 다르다. 네스 다리를 건넜다가 하얀 현대식 철교 위에서 멈춘다. 퐁네프 다리처럼 자물쇠들이 난간을 빼곡히 채웠다. 만질 수 없는 언약들이 작품처럼 걸려 있다. 


2.

캠핑장은 네스 강가 넓은 구릉지대에 있다. 센터에 들러 자리를 배정받고 텐트를 친다. 차량을 이동할 필요가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네스 호는 생각보다 더 거대하다. 어디선가 네시가 떠오를 것 같다. 2003년 BBC에서 네스 호를 탐사했었다. 음파와 위성추적 같은 최신 장비들이 동원되었다. 당시 BBC 탐사는 괴물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공포는 인식의 문제다. 네시를 상상할 만큼 충분히 으스스한 지금이 문제다. 마침 공포를 극대화하는 어둠이 시나브로 내려앉는다. 강 건너 야생의 산림은 내 머리카락처럼 쭈볏 서 있다. 


다시 아침이 밝았다. BBC 탐사는 옳았다. 지난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날카로운 야생동물 소리에 움찔거리기도 했지만, 네시라며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었다. 네스 호 캠핑은 그 자체로 즐거웠다. 늦은 밤까지 네스 호 괴물 이야기를 나누며 서로를 의지하는 끈끈한 밤이었다. 처음에는 서늘하게 읽혔던 캠핑장 이름, Loch Ness Shores도 이제 아름답게 기억될 것이다. 


네스 호는 영연방 최대 담수호다. 잉글랜드와 웨일즈에 있는 모든 호수를 합친 것보다도 수량이 많다. 최대 수심은 230미터에 달하고, 길이는 37킬로미터에 이른다. 호수 자체가 신비로운 대상이 되기에 충분한 하드웨어를 갖췄다. 더불어 시꺼먼 네스 호 물빛은 묘한 아우라를 뿜는다. 어쩌면 이런 곳에 네시 같은 괴물을 상상하는 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3.

아침부터 분주히 움직인다. 오늘도 일정이 간단치 않다. 이른 아침을 먹고 서둘러 캠핑장을 나선다. 첫 일정은 네스 호를 둘러보는 것이다. 인버네스에도 유람선 선착장이 있지만, 우리는 포트 아우구스투스Fort Augustus를 택했다. 여행 동선과도 맞고 이왕이면 하이 랜드 마을을 하나라도 더 구경하고 싶은 마음에서다. 


포트 아우구스투스까지는 네스 강가를 따라 달리기만 하면 된다. 인버네스에서 드럼나드로칫과 인버모리스톤 마을을 지나면 포트 아우구스투스다. 길은 그 너머에 있는 또다른 하이 랜드 중심 도시, 포트 윌리엄Fort William까지 이어진다. 하이 랜드 중심부를 가르는 이 길을 사람들은 그레이트 글렌 웨이Great Glen Way라고 부른다. 총 118.5킬로미터다. 


위대한 글렌의 길은 빼어난 자연 경관을 자랑한다. 숲이 구릉으로 이어지더니 다시 산으로 변한다. 인버네스 오는 길에 만났던 대자연과 비슷하지만 여기는 항상 네스 호가 따라붙는다. 배경이 다르니 풍경도 전혀 다른 감흥을 준다. 인간이 살았다는 흔적이 없는 길을 한동안 달린다. 완전히 자연 속에 고립된 듯한 묘한 기운이 차안에 흐른다.


오랜만에 움직이는 것을 발견한다. 구릉 위를 거닐고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자란다는 해미쉬Hamish다. 덥수룩한 털과 길고 날렵한 뿔이 야성을 드러낸다. 그래도 순수한 눈망울은 내가 알던 소의 그것과 똑같다. 조용하던 차안이 아이들 소리로 시끄럽다. 하이랜드 고원 한 자락을 차지한 해미쉬 무리가 무척 반갑고 고맙다. 


원래 네스 호 근처는 선사시대부터 인류가 살던 풍요로운 땅이었다. 한때는 대규모 농장이 성업하던 핫플레이스였다. 여기서 사람 흔적이 지워진 것은 1746년, 자코바이트 봉기가 실패한 이후다. 하이랜드 대자연에 살던 글렌을 관리하고, 통제하기 위해서는 눈에 보이는 가까운 곳에 두는 것이 최선이라고 여긴 까닭이다. 지금 강변을 달리는 국도도 1700년대에 조성되었다. 개발이 아닌 소탕을 위한 군사 목적의 도로 건설이었다.


4.

어느새 포트 아우구스투스다. 타운 구경보다 유람선 티켓팅이 먼저다. 선착장에 차를 주차한다. 유람선 승선 시간이 빠듯하다. 숨 고를 틈도 없다. 곧장 티켓을 끊고 유람선으로 향한다. 방수복과 구명조끼 같은 안전 장비들이 널린 곳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네스 호를 쾌속정으로 관광하는 사람들이다. 얼핏 봐도 장비를 점검하고 교육하는 과정이 무척 까다롭다. 그럴 필요가 없는 우리는 유유히 그들을 지나 유람선에 오른다.  


로얄 스콧Royal Scot, 우리가 타는 유람선 이름이다. 배는 20여명되는 단촐한 관광객을 태우고 별다른 준비없이 항구를 나선다. 밋밋하게 움직이던 배가 순간 속도를 올린다. 스크류에 빨려든 네스 호가 콜라 거품을 일으킨다. 아름다운 포스 아우구스투스 전경이 로얄 스콧 뒤로 흘러간다. 호수 위에서 보는 네스 호는 압도적이다. 지도에서 ‘길다’는 생각은 했지만 ‘넓다’는 생각은 미쳐 못했었다. 바다 같은 검은 호수는 신비롭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8월의 맑은 하늘이 없었다면, 유람이란 말의 뜻이 무색했을지도 모른다. 


로얄 스콧은 호수 이곳저곳을 유려하게 헤집는다. 1230년에 지어진 하지만 지금은 폐허로 남은 어쿼트Urghart 성은 말 그대로 그림이다. 강변을 달릴 때는 못 봤던 강기슭 저택들이 멋을 보탠다. 호수 반대쪽은 접근하기 힘든 지형이다. 나무가 빼곡하다가 황무지를 드러내고 중간중간 거친 협곡이 사람들을 경계한다. 저런 변화무쌍함 덕분에 아직 인간을 허락하지 않은 영역으로 남았다. 


유람선 창문에 붙은 작고 귀여운 네시 스티커가 인스타 감성을 깨운다. 숲에서는 공룡이었다가, 물에서는 다시 네시가 된다. 아이들이 분주해졌다. 스티커 매직을 카메라에 담는다. 손에도 올렸다가 머리를 짚었다가 입 속에 넣기도 한다. 애초에 이런 생각한 이는 이런 쓰임새를 상상이나 했을까? 작은 아이디어 하나가 유람선을 즐기는 재미를 곱절로 만든다. 한시간 가까이 유람을 마친 배가 항구로 방향을 튼다. 


5.

포트 아우구스투스는 작고 앙증맞은 아기자기한 마을이다. 마을 곳곳에 꽃들이 넘쳐난다. 운하를 거슬러 호수로 오르는 길은 작은 상점과 식당들이 즐비하다. 운하 옆에는 작은 쉼터와 예쁜 정원을 꾸며 놓았다. 운하는 호수와 호수 사이를 배가 지날 수 있게 잇는 인공 수로다. 여기 칼레도니안 운하Caledonian Canal는 마을을 완성하는 핵심이다.  


칼레도니안 운하는 북해에서 아일랜드해로 내륙을 관통한다. 북유럽에서 지중해로 요트 여행을 한다면, 북해에서 네스 호를 지나 칼레도니안 운하를 거쳐 아일랜드해로 빠져나가면 된다. 운하는 몇 개의 도크locks가 마치 계단처럼 층층을 이루고 있다. 배를 들어올리고 내려서 인근 호수로 옮긴다고 하는데, 상상이 안된다. 이런 생각 자체가 놀라운 발명 같다. 200년도 훨씬 전에 말이다. 


운하는 토마스 텔포드Thomas Telford 작품이다. 탄생 250주년을 기념하는 명판(2007년 설치)에는 이런 것이 적혀 있다. ‘60마일에 달하는 운하는 북해와 아이리쉬해 사이에 있는 스코틀랜드를 110피트 너비로 가로지른다. 너비 40피트, 깊이 25피트, 길이 170~180피트짜리 도크가 28개다.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전례 없는 스케일이다. 칼레도니안 운하로 하이랜드와 엔지니어링 기술은 혁혁한 진보를 거두었다’. 운하의 제원과 역사적 의미를 일목요연하게 기술한 문장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명판을 붙인 주체를 보고 갸우뚱한다. 하이랜드에 만든 19세기 초 운하를 1852년에 설립된 미국 토목학회American Society of Civil Engineers가 보증하고 평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점심 시간이다. 도크에 걸터앉는다. 아침에 만든 크로와상 샌드위치를 한입 깨문다. 문득 몇 개월 전, 레이크 디스트릭트 여행에서 구글 지도를 보다가 깜짝 놀랐던 기억이 떠오른다. 섬나라 영국에 그렇게 많은 호수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그 생각에 미치자 영국 사람 입장에서 ‘그것들을 연결하고 싶다’는 욕망은 자연스러울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도크와 정원과 쉼터와 작은 길 곳곳에는 예쁜 가로등이 심겨져 있다. 가로등 하나에 질문 하나가 걸려 있다. Who designed the canal? How deep is the canal? 같은 것들이다. 가로등 질문에 답을 주고받으며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좋은 아이디어는 이렇게 슬며시 스며든다. 놀이로 운하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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