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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Karl Oct 30. 2022

14. 글렌의 복원을
전세계에 선포하다

1.

기차가 증기를 뿜으며 높은 교량 위를 달린다. 아이보리 빛깔 양들은 교량 아래서 한가롭게 풀을 뜯고 있다. 심심하던 편도 차선이 왕복 차선으로 바뀐다. 마침 협곡과 구릉은 산림으로 변신한다. 짙은 초록빛 건강한 나무들이 곧게 하늘로 뻗었다. ‘이케아가 스코틀랜드 가구 브랜드였나?’하는 착각이 들만큼 촘촘하고 빽빽하다. 


하이 랜드가 깊어질수록 A9 국도는 오히려 쾌적해지고 있다. 산림은 다시 초원으로 바뀐다. 휫비 가는 길에 있는 무어 지대를 닮았다. 인버네스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다. 그런데 들판 저 멀리 멋진 현대식 건물이 느닷없이 나타난다. 강렬한 호기심 탓이었을 것이다. 핸들이 저절로 오른쪽으로 젖혀진다. 상황을 통제하면 좋지만 여행에서 변수는 상수로 받아들이는 것이 건강에 좋다. 전혀 의도하지 않은 결과가 역사를 만드는 법이다. 


멋진 건물은 쿨로덴 전투지 방문자 센터Culloden Battlefield Visitor Center다. ‘Real People, Real Stories’라는 슬로건 아래에 센터가 우리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들을 적어 놓았다. ‘역사의 소리를 들어라! 전투의 생생함을 느껴라! 전투지의 전경을 보라! 실제 일어난 일을 발견하라!’. 후세에 전하고 싶은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마치 망월동 묘지를 걷는 묘한 기분이 든다. 1746년 4월 16일, 단 하루에 끝난 쿨로덴 전투는 스코틀랜드, 아니 영국와 유럽, 더 나아가 세계사의 진로를 변경시킨 역사적 사건이다. 


2.

1688년, 카톨릭을 신봉하고 의회를 무시하던 제임스2세가 퇴위된다. 역사는 피 흘리지 않고 왕위가 교체됐다는 의미로, 이를 ‘명예혁명’이라 부른다. 이듬해 발표된 권리장전은 영국이 전제군주제와 결별하고 입헌군주제로 간다는 선언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명과 암이 있는 법이다. 왕을 프랑스로 추방하고, 왕위 계승 문제를 의회가 좌지우지하는 것이 못마땅한 사람들도 많았다. 이들은 제임스2세와 그의 아들을 복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런 생각을 지지한 세력을 ‘자코바이트Jacobite’라 불렀다. 자코바이트는 James의 라틴어 이름, 야코부스Jacobus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자코바이트들의 정치적, 군사적 행동이 ‘Jacobite Risings’이다. 우리말로는 자코바이트 운동이나 반란, 봉기 정도로 해석한다. 개인적으로는 ‘봉기’가 마음에 든다. 운동은 너무 아카데믹하고, 반란은 잉글랜드 입장만 담긴 표현이다. 요컨대, 잉글랜드에 대한 스코틀랜드의 뿌리깊은 반감과 대립 의식이 대폭발한 사건이라는 점에서 ‘자코바이트 봉기’가 더 어울린다. 


스코틀랜드 입장에서 명예혁명(1688)은 스코틀랜드 스튜어트 왕조를 왕좌에서 몰아낸 사건이었다. 이후 ‘잉글랜드-스코틀랜드 연합법’(1707)이 스코틀랜드의 반 잉글랜드 정서를 더욱 악화시켰다. 역사적, 종교적 갈등은 억제하고 경제적 이익을 우선하자는 논리로 연합법을 채택했지만, 스코틀랜드 경제에는 별다른 이익을 주지 못했다. 적대적 감정만 점점 더 깊어 갔다.


마침내 1745년, 찰스 에드워드 스튜어트(제임스2세의 아들)가 프랑스의 지지를 업고 스코틀랜드에 상륙한다. 그리고 하이 랜드 지역 글랜(씨족)과 카톨릭 교도들을 규합하여 왕위 찬탈을 위한 군사행동을 일으킨다. 초반 분위기는 좋았다. 맨체스터 북쪽까지 밀고 내려갔었다. 그러나 딱 거기까지 만이었다. 이후 자코바이트 군은 스코틀랜드 곳곳에서 영국 정부군과 공방을 주고받는다. 1년 동안 치른 내전에 마침표를 찍는 최후의 전투가 바로 쿨로덴 전투다. 


3.

1746년 4월 16일, 자코바이트 군 오천 명과 영국 정부군 팔천 명이 쿨로덴 습지에서 대치한다. 전세는 이미 기울어 있었다. 자코바이트 군은 총과 대포는 커녕, 칼과 창, 노획한 무기를 더해도 무장한 병력이 20%에 불과했다. 반면 조지2세의 아들, 컴벌랜드 공작이 이끄는 정부군은 기병과 대포를 앞세운 정예 주력군이었다. 상식적으로 쿨로덴 벌판이 아닌 다른 지역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는 것이 당연했지만, 어떤 이유인지는 몰라도 찰스 왕자는 정면 대결을 고집한다. 


결과는 뻔했다. 백병전으로 돌진하는 자코바이트를 향해 정부군 화기가 불을 뿜었다. 자코바이트 사망자가 천 오백 명, 반면 정부군 사망자는 불과 오십여 명에 불과한 일방적인 전투였다. 전투를 끝내는데 채 한 시간도 필요 없었다. 정부군은 도망치는 패잔병은 물론 전장에 쓰러진 병사들까지 도륙했다. 컴벌랜드 공작이 도살자라는 별명은 얻는 전투의 잔인한 마무리였다. 쿨로덴 전투에서 참패한 이후, 찰스 왕자는 살아서 프랑스로 돌아갔지만, 그것으로 끝이었다. 


영국 정부는 하이 랜드 탄압을 공식화한다. 쿨로덴 전투에 참가한 75% 이상이 하이 랜드 사람들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복식법Dress Act을 제정한다. 글랜의 상징인 킬트 착용을 전면 금지시킨다. 다음은 게일어를 말살하는 정책이 시행된다. 이후로도 스코틀랜드 고유 역사와 정체성을 지우는 조치들이 계속된다. 어딘가 낯익은 것이 일제와 판박이다. ‘역사는 반복된다’는 아놀드 토인비의 말을 떠올리다가 그가 영국인이란 사실에 살짝 소름이 돋는다. 


4.

쿨로덴 전투지를 걷는다. 가운데 벌판을 두고 펄럭이는 깃발들이 대치하고 있다. 한쪽 푸른 깃발은 자코바이트 군이 서있던 라인을 표시한다. 하루에 비스켓 3개를 배급 받고 전선에 섰다는 자코바이트들의 고단한 모습이 그려진다. 다른 쪽 붉은 깃발은 정부군 라인이다. 센터에 있던 조감도를 들판에 그대로 옮겨 놓았다. 당시를 충분히 고증했다고 한다. 지금 옛 전투지 안은 야생화로 가득하다.


습지 사이사이 작은 샛길을 따라 여기저기를 계획없이 걷는다. 글렌 이름이 적힌 커다란 표지석들이 곳곳에 놓여 있다. 어떤 것은 여러 글렌 이름이 표지석 하나에 함께 새겨져 있기도 한다. 표지석은 기념비이자 곧 묘비다. 모두 부모와 자식과 형제를 잃은 글렌들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후손들이 조상을 기리며 두고 간 꽃들이 표지석 아래를 덮고 있다. 


커다란 돌무덤 하나가 눈에 띈다. Memorial Cairn은 1881년에 조성되었다. 찰스 왕자와 스코틀랜드를 위해 싸운 용맹한 하이 랜드 글렌들 이름이 한쪽 면이 넘치도록 촘촘히도 새겨 넣었다. 쿨로덴 전투가 슬픈 이유가 또 있다. 당시 정부군에는 스코틀랜드 사람들도 많았다는 점이다. 역사가들이 영국 역사상 가장 잔혹한 전투로 쿨로덴을 지목하는 이유다. 


쿨로덴 전투는 하이 랜드를 붕괴시켰다. 이후 100여년 동안, 영국이 의식적으로 자행한 하이 랜드 클리어런스Highland Clearances 정책은 이 지역을 세계에서 인구 밀도가 가장 낮은 지역으로 만들었다. 핵심은 글렌의 해체였다. 방문자 센터는 정확히 그 지점을 파고들고 있다. 글랜 이름을 검색하면, 선조들이 전투지 어디서 어떻게 싸웠는지를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쿨로덴 전투라는 역사적 사건을 현재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게 만든다. 우리 같은 관광객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전율과 울림의 공간이다. 그런 의미에서, 쿨로덴 전투지 방문자 센터가 개장한 2008년 4월 16일은 글랜의 복원을 전세계에 선포한 날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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