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코틀랜드는 크게 두 지역으로 나뉜다. 스코틀랜드 아래가 로우 랜드, 윗쪽이 하이 랜드다. 로우 랜드는 에딘버러나 글라스고 같은 상업 도시들이 제법 있는 반면, 하이 랜드는 유럽에서 가장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 중 하나다. 주민들은 주로 어업에 종사한다. 오늘 최종 목적지인 인버네스는 하이 랜드 중심 도시다. 그럼에도 인구는 7만이 못된다.
하루를 시작하는 마음이 개운치 않다. 어젯밤 인버네스로 가는 길을 정하는 문제로 아내와 짧은 언쟁이 있었다. 인버네스로 곧장 가자는 아내와 조금 늦더라도 글라미스 성Glamis Castle을 들르자는 내 의견이 평행선을 달렸기 때문이다. 성은 엘리자베스2세가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다. 또한 어머니가 태어난 장소라 애정이 남달라서인지, 여왕은 매년 여름 휴가지로 이곳을 주로 찾았다. 더불어 글라미스 성은 이보다 훨씬 많은 이야기와 비밀을 간직하고 있다.
세익스피어 4대 비극 중 하나인 <맥베스>의 배경이 바로 거기다. 멕베스가 던킨 왕을 시해하고 절규했다는 그 장소다. 멕베스의 방에는 빨간 커튼이 걸린 침대가 있다고 한다. 제임스5세가 화형 시킨 ‘하얀 숙녀’라는 마녀 유령 이야기도 있다. 한편 ‘글라미스의 괴물’은 글라미스 성을 계승한 사람들에게만 전해진다는 미스터리물이다. 분명 아쉬워할 일을 포기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
그럼에도 말수가 줄어든 아내의 차가운 표정에 저항 한번없이 차를 인버네스로 몬다. 아내가 가장 위험할 때는 침묵할 때다. 아내 생각이 옳다. 하이 랜드를 관통하는 길은 만만치 않다. 케언곰스Cairngorms 국립공원을 넘는 험한 길을 200킬로미터 넘게 달려야 한다. 게다가 오늘 숙소는 캠핑장이다. 계속 이렇게 스스로를 위로한다.
2.
스코틀랜드에서 3번째로 큰 도시, 퍼스Perth를 지나 퍼스셔Perthshire 숲으로 들어간다. 글라미스 성을 포기하고 선택한 경유지는 헤르미타지The Hermitage다. 퍼스셔 숲에 있는 이름난 산책로다. 던켈트Dunkeld 마을로 가는 오래된 아치형 다리를 지난다. 던켈트는 마을 전체를 17~18세기 모습으로 완벽히 복원한 전통마을이다. 용인 민속촌 같은 곳이다. 한눈도 팔지 않고 헤르미타지로 달린다.
헤르미타지 입구에서 안내글을 읽는다. 숲을 산책하는 여러 옵션이 적혀 있다. 우리는 오시안 홀Ossian’s Hall에 이르는 왕복 2.5킬로미터 코스를 선택한다. 1시간 정도면 충분한 거리다. 푸드 트럭에서 간단한 음료와 먹거리를 사서 가방에 챙기고 산행을 시작한다. 10미터 남짓한 성벽같은 묵직한 터널을 지난다.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엄청나게 큰 전나무들이 빼곡한 숲을 이루고 있다. 안내글에서 읽은 Big Tree Country라는 애칭은 말잔치가 아니었다.
숲길 옆으로 테이 강 지류인 브란Braan 계곡이 기네스 맥주처럼 흐른다. 검은 물이 하얀 물보라를 일으킨다. 물소리가 우렁차다. 풍부한 수량과 거친 물살이 만든 소리가 울창한 숲에 증폭되어 더 크게 들린다. 아무런 인기척도 없이 킬트를 차려 입은 중년 남성이 바쁘게 우리를 앞지른다. 그제서야 서걱거리는 경쾌한 발걸음 소리가 들린다.
제법 넓은 정돈된 공간이 숲 속에 나타난다. 노신사가 하얀 개를 데리고 서 있다. 신사의 하얀 머리카락보다도 더 희다. 개는 노인보다 덩치가 더 크다. 움찔한 아이들이 내 뒤로 숨는다. 신사가 괜찮다며 아이들을 부른다. 하얀 덩치는 더없이 친절한다. 움찔한 것을 사과라도 해야 할 지경이다. 여기는 헤르미타지에서 가장 오래된 전나무들이 군집해 있는 곳이다. 가장 큰 것은 64.6미터에 이른다. 몇 년 전 기록이니 지금은 70미터가 넘을지도 모르겠다.
벤치에 앉는다. 전나무 열매 모양을 길쭉하게 조각한 벤치다. 통나무 하나로 조각된 이 독특한 벤치는 이름도 있다. 더글라스 전나무 벤치다. 데이비드 더글라스(David Douglas, 1799~1834)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씨앗seed들을 채집하며 전세계를 돌아다녔다. 그때 더글라스가 가져온 전나무 씨앗에서 이 거대한 숲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스코틀랜드에 있는 모든 전나무는 이 숲의 후손들이다. 이런 연유로 스코틀랜드 전나무는 모두 ‘더글라스 전나무’다. 더글라스 벤치에 눕는다. 전나무 사이로 하늘이 열린다. 역사에 이름을 남기는 방법도 참 다양하다.
3.
다시 숲을 오른다. 브란 계곡을 건너는 작은 아치형 다리에서 멈춘다. 이끼같은 습생식물이 돌다리 구석구석 빼곡히 살고 있다. 다리 건너는 길을 막았다. 다리 중간에 서서 계곡 풍경을 감상한다. 나무 사이로 수줍게 모습을 드러낸 오시안 홀이 보인다. 오시안 홀은 폭포가 계곡에 만든 큰 웅덩이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여기 건물을 처음 세운 건 1757년이다. 누군가가 집을 짓고 헤르미타지라는 이름을 붙였다. 은둔자라는 뜻이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호숫가에 지은 오두막보다 100년 가까이 앞선다.
오시안Ossian은 스코틀랜드 신화에 등장하는 이야기꾼이자 시인이다. 어쩌면 오시안 홀은 오시안을 섬기는 사원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형태를 갖춘 것은 1782년이다. 밖에서 보는 것보다 내부는 훨씬 넓다. 벽체 대부분은 그림과 거울로 채워져 있다. 정면은 큰 통유리다. 폭포Black Linn Fall를 감상에 최적이다. 폭포가 곤두박질치는 모습을 한동안 멍하니 바라본다. 처음 이곳에 이걸 짓겠다고 생각한 누구가의 마음을 알겠다.
4.
A9 국도가 케언곰스 국립공원 왼편을 뚫는다. 높은 봉우리에서 물줄기 하나가 허공을 가르며 자유 낙하한다. 물은 언제 소란했냐는 듯 완만한 구릉을 타고 편안히 흐른다. 아마도 대자연이란 단어를 이미지로 그려본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싶다. 이 외딴 곳에 트레킹 길이 도로 옆에 생겨난다. 놀랍게도 이 길은 걷는 한 사내를 발견한다. 구릉 뒤로 시선을 돌리는 작은 몸짓에 멋짐이 넘친다. 카메라로 그냥 훑기만 해도 광고 한 편이 나올 것처럼 아름답다. 장중하면서 서정적이다.
Natural call me!를 외치며 준서가 화장실을 찾는다. 작은 마을 킹구시Kingussie에 차를 세운다. 킹구시는 소나무숲의 머리Head of the Pine forest라는 뜻이다. 소나무 군락지 끝에 마을이 정착한 모양이다. 주차장 인근 잔디구장에서 필드하키를 즐기고 사람들이 보인다. 그런데 경기방식이 좀 다르다. 공도 띄우고, 스틱 양면을 모두 사용한다. 필드하키는 금지하고 있는 룰이다. 덕분에 필드하키보다 훨씬 스펙타클하다.
신티Shinty라는 스포츠다. 신티는 하이 랜드가 고향이다. 아일랜드 허링Hurling, 웨일즈 반도Bando와 유사한 역사적 뿌리를 가지고 있다. 협회 설립은 1893년이지만, 그 뿌리는 훨씬 오래 전이다. 신티는 한마디로 터프한 필드하키다. 문명화 과정을 거치며 필드하키로 진화한 것이 틀림없다. 눈 앞에 있는 킹구시 신티 경기장은 ‘신티의 집Home of Shinty’이다. 그리고 킹구시는 초대 신티 챔피온십에서 챔피온에 오른 이후, 20년 넘게 연속 우승, 4년 연속 무패 행진 등 신티에 관한 모든 기네스북 기록을 가지고 있다. 뜻밖의 만남을 즐기는 동안, 준서가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