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 Karl Oct 30. 2022

11. 골프의 집
스윌칸 다리 위에 서다

1.

오늘은 하이랜드 여행을 시작하는 첫날이다. 첫 행선지는 세인트 앤드류스St Andrews다. 에딘버러 외곽에 있는 Forth Road Bridge를 건넌다. 영국에서 가장 긴 현수교로 2.5킬로미터나 된다. 다리 밑은 시커먼 북해가 물결친다. 바람이 거세다. 흔들리는 다리가 차도 흔든다. 멀리 준하 또래 여자 아이 여럿이 다리를 건너오고 있다. 이솝 우화에서 바람을 견디는 나그네들 같다. 어린 친구들이 굳이 이런 날씨에 길고 위험한 다리를 건너는 이유를 모르겠다. 


다리는 해안을 따라 그어진 A915 국도와 만난다. 하늘과 땅이 세상을 절반씩 똑같이 나눠 가졌다. 산도 구릉도 집도 없는 낯선 풍경이 신기하다. 푸른 초지만 가르며 한동안 달린다. 감탄이 지루함으로 바뀌는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허름한 농가만 나와도 반가운 지경에 이른다. 사람 마음은 믿을 게 못된다는 말을 체득한다. 저기 모리슨Morrisons 간판이 나타난다. 홈플러스 같은 대형매장이다. 세인트 앤드류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 


세인트 앤드류스 성 주차장에 차를 세운다. 13세기에 지은 성은 입구 쪽 파사드만 남기고 죄다 무너졌다. 폐허가 된 성과 집들이 작은 길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다. 작은 도로와 딱 그만한 산책길이 작은 화단을 경계로 지분을 나눠 가졌다. 해안가 길을 따라 세인트 앤드류스를 걷는다. 에딘버러와는 전혀 다른 정취를 느낀다. 


2.

오래된 교회 옆 오래되고 거대한 건축물이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이다. 옥스포드, 캠브리지와 함께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대학 중 하나다. 더불어 가장 입학하기 힘든 대학 중 하나이기도 하다. 우리에겐 윌리엄 왕자와 케이트 왕자비가 만난 대학으로 알려졌다. 실제로 윌리엄 왕자가 입학하던 당시, 미국 여자 신입생들 입학이 눈에 띄게 늘었었다. 신분을 쟁취하려는 진취적인 여성들이 대서양을 많이도 건넜다. 1413년에 설립한 대학의 아우라가 담 너머로 흘러 넘친다. 


대학 맞은 편 해안 쪽은 오래된 멋진 저택들이 터를 잡았다. 저택과 산책길을 구분하던 담벼락이 어느 순간 사라진다. 그 빈 자리로 북해가 펼쳐진다. 그 끝을 가늠하기 힘들 만큼 수평선이 멀리 보인다. 아찔한 풍경이다. 나도 모르게 큰 숨을 한번 뱉는다. 이런 풍경 속에서 일상을 살 수 있는 저택을 소유한 누군가가 진심으로 얄밉게 부럽다. 


낮은 언덕 끝에 기념비가 서 있다. Martyrs’ Monument는 높이가 10미터가 넘는다. 다소 거칠고 둔탁하게 오벨리스크를 흉내 냈다. 16세기 초반,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이전에 희생된 지역 개신교 인사 네 명을 기리고 있다. 루터 교리를 선전하고, 영어 신약성서 사본을 지니고, 카톨릭 교회에 반항하거나, 결혼한 성직자를 옹호한 것이 죄목이다. 목숨을 앗은 이유가 너무 옹졸하다. 역사를 지금의 상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교양인의 자세가 아니지만, 그럼에도 이런 어이없는 대목에선 화가 치민다.


기념비는 300여년이 지난 1834년에 세워졌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 마무리된 1560년 이후로도 274년을 그냥 흘러 보냈다. 그러다 갑자기 저런 비상식적으로 큰 기념비가 탄생된 이유가 궁금하다. 아쉽게도 이런 궁금증을 해소시켜주는 다른 설명은 없다. 순교를 기리기 것보다 그것을 이용한 다른 의도가 있었다는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혼자만의 생각을 되뇌며 하릴없이 바라본 언덕 아래로 세인트 앤드류스 골프클럽The Royal and Ancient Golf Club of St Andrews이 보인다.


3.

여기는 골프인의 성지다. 15세기 초, 골프라는 스포츠가 여기서 시작했다. 이름에 ‘로얄Royal’이나 ‘고대Ancient’ 같은 특별한 수식어가 따라붙는 이유다. 또한 여기는 골프 규칙이 최초로 성문화된 곳이다. 지금도 새로운 골프 룰은 여기서 제정되고 공포된다. 그래서 세인트 앤드류스 골프클럽은 ‘골프의 집Home of Golf’으로 불린다. 


클럽하우스에서 올드 코스Old Course를 흐뭇하게 바라본다. 클럽하우스를 나서면 곧바로 1번 홀 티박스다. 차를 마시다가 곧장 플레이할 수 있다. 18번 홀 그린은 1번 홀 티박스 옆에 있다. 올드 코스 열 여덟 개 홀은 경계가 없다. 오로지 잦은 오르막과 내리막을 가진 구릉과 그 사이에 숨은 벙커 뿐이다. 1번 홀 티박스에서 플레이를 준비하는 사람들을 본다. 모두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얼굴들이다. 


공식 라이선스 매장이 18번 홀 그린 옆에 있다. 매장으로 가는 길 이름이 Links Cres다. Links는 지명이고, Cres는 Crescent 를 줄인 표현이다. 초승달처럼 휘어지는 길에 붙는 일반적인 명칭이다. 보통 해안가에 조성한 골프 코스를 링크스links 코스라고 부른다. 세인트 앤드류스 지명에서 링크스가 유래한 것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대단한 발견이다. 


클럽과 올드 코스 그리고 The OPEN 관련 기념품들로 매장 안에 가득하다. 더오픈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골프 대회다. 그래서 가장 권위있는 대회다. 1860년 1회 대회를 시작으로 4년에 한번씩 개최된다. 프로와 아마추어의 문턱이 없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념품들은 골퍼인 나에게는 의미가 크지만, 골알못 아내에게는 쓸모 없는 물건들이다. 가장 부피가 작고 가장 유용하고 가장 기념이 되는 볼마커만 수십 종 산다. 


4.

The West Sands 해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올드 코스는 북해로 향하는 넓은 구릉지에 깃발만 꽂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번과 18번 홀 페어웨이를 가로지르는 작은 물길도 자연의 순리 그대로다. 홀과 홀 사이를 굳이 구분하지 않은 것도 그런 까닭이다. 심지어 골퍼과 구경하는 사람의 경계도 없다. 물길을 따라 해안으로 향하는 길이 나 있다. 서로는 피해를 주지 않는 적당한 선에서 공존한다. 가끔 Excuse me!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리지만, 원래의 질서가 무너지지는 않는다.  


작은 물길을 건너는 스윌칸 브리지Swilcan Bridge 위에 선다. 길이 30피트, 너비 8피트, 높이 6피트에 불과한 작은 다리다. 처음은 목동과 가축을 위한 것이었지만, 지금은 골프에서 가장 유명한 문화 아이콘이다. 많은 골프 챔피온들이 이 자그만 로마식 아치교에 존경과 경의를 표해왔다. 2010년 더오픈 우승자 톰 왓슨은 다리에 키스를 했고, 잭 니클라우스는 다리 위에서 은퇴 선언(2005년)을 했다. 나도 그 다리에 올라서 파노라마 컷을 야무지게 찍는다. 스윌칸 다리는 자체로도 700년 이상 된 문화재급이다. 


올드 코스는 해안을 따라 오른쪽으로 크게 휘었다. 그 뒤에 미니 골프장이 숨어있다. 정확히는 퍼팅장이다. 아이들을 위한 일종의 어트랙션이다. 티켓을 끊고 퍼터를 하나씩 대여한다. 가족이 주최하는 더오픈을 개최한다. 오르막과 내리막을 두 번 넘게 구르던 볼이 홀컵 속에 빨려 들어간다. 20미터가 넘는 멋진 퍼팅에 눈치 없는 세레머니를 펼친다. 주변 사람들까지 박수로 축하해 준다. 너무 즐겁고 너무 흥겹다. 


골프는 원래부터 중독성 강한 스포츠였다. 조선 건국 초기에 시작된 골프는 순식간에 스코틀랜드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이를 크게 문제 삼은 왕은 국방에 중요한 양궁 연습을 게을리한다는 이유로 골프 금지령을 공포한다. 하지만 그 조치는 오래가지 못했다. 대중의 즐거움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한 정부가 금지령을 폐지한 것이 1502년이다. 


이전 10화 10. 솔즈버리 크래그 가는 길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