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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Karl Oct 30. 2022

10. 솔즈버리 크래그 가는 길

1. 

여왕의 집 가까운 곳에 ‘여왕의 교회’가 있다. 엘리자베스 여왕이 훌리루드에 머무는 동안 예배를 올리던 곳이라 붙은 별칭이다. 여왕이 돌아가셨으니 이제는 왕의 교회로 불릴지도 모르겠다. 교회는 궁전과 지척이다. 여왕의 교회, 캐논게이트Canongate는 에딘버러에서 가장 간단한 건물이다. 단촐하고 겸손하다. 원과 반원, 기둥 같은 기하학적 요소로 꾸며져 상당히 현대적인 인상을 준다. 며칠 전, 칼튼 힐에서 본 초록색 모자를 쓴 하얀 독특한 건물이 궁금했는데, 오늘 그 정체를 알았다. 


캐논케이트 교회는 1688년에 지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이 끝나고 100년 이상 시간이 흐른 후다. 카톨릭의 허세는 사라지고 개신교의 청교도 정신이 빚은 건축물이다. 웅장하고 화려한 것은 하나도 없다. 여느 교회들처럼 뜰에는 묘비들로 가득하다. 에딘버러 유명인들은 대부분 여기 묻혔다. 가장 유명한 인사는 아담 스미스다. 그 다음이 로버트 퍼거슨Robert Fergusson이라는데, 시인이라는 그의 이름은 처음 듣는다. 


아담 스미스 묘는 교회 입구 왼쪽에 바로 있다. 이웃하는 건물 벽에 묘비가 걸려 있다. 산 사람을 위한 창문이 죽은 사람 비석 위에 바짝 붙어 있다. 삶과 죽음에 대한 개념이 다른 건지, 무덤 주인이 아담 스미스라서 봐주는 건지, 납득하기 어려운 조합을 앵글에 담는다. 내가 마르크스 무덤을 찾아 런던 외곽 하이게이트를 마다하지 않는 것처럼, 세계 경제학자들에게 이곳은 순례지다. 


묘비에 쓰인 문구가 의미심장하다. ‘인간의 노동력은 다른 모든 재산을 만드는 본원적 기초이기 때문에 가장 신성하고 침범할 수 없는 것이다’. 노동이 모든 가치를 만든다는 마르크스 노동가치설의 핵심을 아담 스미스 무덤에서 한 줄로 읽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는 국부의 본질과 원천도 결국 인간 노동임을 묘비에 분명히 밝혀 놓았다. 


바닥에서 뭔가 반짝인다. 아담 스미스의 이름과 얼굴을 벽돌 모양 작은 동판 위에 새겨 놓았다. 저것의 용도는 명확치 않다.  만약 근대 경제학을 다룬 최초 저술로 평가받는 <국부론>을 쓴 저자 무덤을 알리는 것이 목적이라면, 그것은 완전히 실패한 기획이다. 묘보다 동판 찾기가 훨씬 더 어렵다.   


2.

이번엔 퍼거슨 묘를 찾는다. 어렵게 무덤을 확인한다. 이름도 모르던 시인의 묘를 찾아 시간과 노력을 들인 것은 입구에서 본 동상 때문이다. 어딘가로 바쁘게 움직이는 현대인을 연상시키는 모던한 동상이었다. 그는 1751년에 태어나 1774년에 죽었다. 이상이나 기형도보다도 짧은 생을 살았다. 더구나 사후 50년이 지나서야 묘비가 세워졌다. 뒤늦게 묘비를 세운 사람은 로버트 번즈Robert Burns다. 스코틀랜드에서 국민 시인으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그는 퍼거슨으로부터 많은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퍼거슨 무덤을 찾다가 흥미로운 발견을 한다. 리치오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이다. 여왕 메리의 남편 단리에서 살해당했다. 작은 청동 명패에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여기는 홀리루드에서 이송된 데이비드 리치오 무덤으로 전해진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여러가지 이유로 이 주장은 가능성이 낮다고 평가한다. 독실한 카돌릭 신자가 신교도 묘지에 묻힌 것도 그렇지만 사후 100년이나 지나서 여기로 옮겨진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하지만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저 정도 논거로는 리치오 묘가 아니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3.

아침에 지나쳤던 멋스러운 의회 건물로 걸음을 옮긴다. 스코틀랜드 의회는 13세기 초부터 1707년까지 존속했다. 영국과 합병하며 모든 입법 권한이 웨스트민스터로 이양된 이후, 스코틀랜드 의회는 300여년간 동면에 들었다. 1997년 국민 총투표로 의회를 부활시키는 계기를 만들고, 1999년에 다시 입법권을 찾아왔다. 어셈블리 홀을 임시 의회로 쓰다가 여기에 새 건물을 짓고 완전히 정착한 것은 2004년부터다.  


스코틀랜드 의회 건물은 스페인 건축가가 설계했다. 가우디 후예 답게 살아있는 나무에서 꽃이 피는 모양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재료도 돌과 나무, 유리를 적절히 섞어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다. 유려한 곡선 외관은 불규칙해 보이지만 전체적으로는 질서를 가지고 있다. 똑같은 크기와 모양의 창문은 하나도 없다. 대영 박물관 그레이트 코트나 에덴 프로젝트에 있는 The Core 천장과 닮은 점이 많다. 


웨스트민스터가 돌로 만든 정형적인 묵직한 건물이라면, 스코틀랜드 의회는 날렵하면서 자유분방하다. 내부 모습은 이런 평가에 더욱 힘을 싣는다. 큼직큼직한 나무들이 공간을 시원시원하게 분할한다. 유리로 쏟아지는 넉넉한 자연채광만으로도 실내는 충분히 밝다. 나무와 유리, 빛이 어우러지는 공간은 이곳을 살아있는 건물로 격상시킨다.


의회 앞이 천막 시위로 분주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시위대의 심각한 얼굴은 없다. 현수막 문구가 좀 이상하다. ‘70years since nuclear bombing of hiroshima and Nagasaki’.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원자 폭단을 기억하는 것이 스코틀랜드 의회와 어떤 상관성이 있는지는 모르겠다. 내용이 궁금하지만, 오늘 일정을 생각하면 지체할 시간이 없다. 


정원을 가로질러 솔즈버리 크래그로 향한다. Dynamic Earth라는 과학관으로 가는 갈림길에 선다. 빅뱅에서 현대까지, 지구 역사를 다양한 어트랙션으로 한눈에 배우는 곳이라는 매력적인 문구에 잠깐 솔깃했다가 멈춘 걸음을 이어간다. 공원 주차장이 솔즈버리 크래그로 가는 입구다. 아이스크림 차가 성업 중이다. 1인 1아이스크림을 주문한다. 달달한 것이 딱 필요했던 시간이다. 


4.

솔즈버리 크래그 가는 길은 1820년 The Radical War와 관련이 깊다. 당시는 프랑스 혁명 영향으로 대영제국에도 개혁에 대한 요구가 거샜던 시기였다. 스코틀랜드도 예외가 아니었다. 파업과 소요 사태가 끊이지 않다가, 거의 내전에 가까운 봉기가 한 주 동안 발생한다. 일명 스코틀랜드 봉기로 불리는 The Radical War 이후, 경기가 침체되면서 많은 방직노동자들이 실업 사태를 맞는다. 이때 잉여 노동력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기획한 것이 솔즈버리 크래그 가는 길이었다. 일종의 작은 뉴딜 정책이었다. 그래서 길 이름도 Radical Rd다. 기념탑 주인공, 월트 스콧이 낸 아이디어라는 것이 흥미롭다.  


가파른 산길은 200여년 전 노동자들 덕분에 편안하다. 그러나 모든 것은 상대적인 법, 제법 많은 관광객들이 산길 모퉁이에 앉아 숨을 고르고 있다. 아이스크림을 들고 재잘거리며 길을 오르는 동양인 가족이 신기한듯 인사를 건넨다. 30분쯤 올랐을까? 홀리루드 궁전 안뜰이 시야에 잡히고, 칼튼 힐과 눈을 맞추는 높이에 오른다. 말수가 조금 줄었다. 바람 점퍼는 벗은 지는 오래고 이마에 땀도 맺힌다. 길은 점점 더 거칠어지고, 너비도 절반은 줄었다. 떨어지는 돌Falling Rocks을 조심하라는 명판이 자주 발견된다. 아이들 손을 붙들고 10분 정도를 더 오른다. 


솔즈버리 크래그 끄트머리로 보이는 곳에 제법 넓은 공간이 열린다. 에딘버러 시내와 저 멀리 북해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로열 마일도 선명하다. 에딘버러 성, 더허브, 세인트 자일스 교회, 트론 교회, 캐논게이트 교회, 의회 건물, 홀리루드 궁전까지 부지런히 다닌 랜드마크들을 단번에 훑는다. 단연 에딘버러 최고의 풍경 맛집이다. 이 풍경을 담은 그림이나 사진을 아직 못 봤다는 사실이 믿기질 않는다. 밀리터리 타투 무대도 여기서는 보인다. 해리포터에 나온 쿼디치 경기장을 닮았다. 


솔즈버리 크래그를 오른 또 다른 목적이 있다. 아서 왕의 의자Arthur’s Seat다. 전설의 카멜롯Camelot 성이 여기 어디라는 이야기도 있고, 웨일즈 유명인이 이곳 스코틀랜드까지 왜 왔는지도 궁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저 너머 아서 왕의 의자로 가는 길이 없다. 절벽을 끼고 산 아래로 이어진 길 밖에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왔던 길과는 애초부터 가는 길이 달랐던 모양이다. 멀리서는 손톱 크기로 보이던 주상절리는 족히 50미터가 넘는 통곡의 벽처럼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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