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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Karl Oct 30. 2022

8. 걸어서 에딘버러 속으로

1.

로열 마일을 탈출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가까운 클로즈Close로 몸을 밀어 넣는 것이다. 클로즈는 좁은 골목길을 뜻한다. 거리에서는 건물로 들어가는 입구 같지만, 실제는 길을 잇는 길이다. 클로즈는 16세기쯤 만들어졌다고 전해진다. 로열 마일은 왕의 길이었다. 왕의 길로 다닐 수 없었던 서민들의 뒷골목 길이 클로즈다. 클로즈는 마치 미로 같다. 드론 뷰로 지도를 그리면 로열 마일이란 등뼈 사이로 생선가시처럼 클로즈가 펼쳐진다. 그래서 이름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클로즈를 헤링본herringbone, 청어의 뼈라고 부르곤 한다.


메리 킹즈 클로즈Mary King’s Close로 몸을 밀어 넣는다. 1미터 남짓한 좁은 길로 건물을 지나자 곧장 하늘이 열린다. 로열 마일의 소란함이 단 몇 초 만에 사라진다. 평행 세계로 공간을 이동한듯 한가롭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내려간다. 예스럽고 아늑한 또다른 에딘버러가 반갑다. 메리 킹즈 클로즈는 고스트ghost 투어가 시작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만큼 중세 모습이 잘 갖춰져 있고, 이야기거리가 많은 곳이라는 의미다. 


아기자기한 풍경이 가득한 16세기 하층민들의 고즈넉한 길은 프린세스 스트리트 공원으로 우리를 안내한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공원의 역사를 가늠케 한다. 공원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하는 방식을 선택한 모양이다. 인위적인 것은 찾을 수가 없다. 아늑하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무심히 걷다가 포스터 하나를 발견한다. 개가 실례를 하면 50파운드 벌금에 처한다는 경고 문구가 유쾌한 유머로 읽히는 상쾌한 산책이다.


2.

숲은 국립미술관과 연결된다. 어제는 외발자전거를 타고 자물쇠를 풀던 미술관 마당을 오늘은 중국 청년이 차지했다. 요요가 하늘 위로 치솟을 때마다 사람들은 함성을 지른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어셈블리 홀을 찾아간다. 어제와 정확히 반대되는 동선이다. 어제는 없던 길다란 현수막이 홀 입구에 걸렸다. 쌍탑 전면을 완전히 가릴 만큼 크다. 


다시 밀른 코트Milne’s Court 클로즈를 지나 로열 마일에 이른다. 우리를 에딘버러 성으로 가는 사거리에 데려다 놓았다. 사거리 중심에 자리잡은 커다란 건축물이 인상적이다. 에딘버러에는 잘 없는 고딕 양식이다. 당연히 교회라고 했는데, 다른 이름이 붙어 있다. 무려 The HUB다. 여기는 다목적 엔터테인먼트 공간이다. 공공예술과 문화행사는 물론 결혼식, 기업 행사, 컨퍼런스 등을 개최한다.


특별히 더허브는 프린지 기간에 가장 빛나는 장소가 된다. 프린지 페스티벌 전체를 총괄하는 대장 건물이다. 1840년 건물이 처음 지어질 때는 스코틀랜드 교회들이 총회를 여는 장소로 쓰였다. 그 때나 지금이나 허브 역할이라는 건물 본래의 목적성은 변함이 없는 셈이다. 새삼 더허브라는 이름이 더 섹시하게 들린다. 


3.

프린지 대장 건물을 지나 존스톤Johnston Terrace 길을 걷는다. 탁 트인 에딘버러 전경이 시원하다. 길 이름에 테라스가 붙은 것은 아마도 이런 멋진 조망 덕분일 것이다. 뒤로는 에딘버러 성이 앞으로 쏟아질 듯 아찔하다. 가파르게 솟은 바위산 위에 앉은 성은 그야말로 천연 요새다. 자연이 만든 성 위에 인간의 성을 세운 것이다. 화산암으로 만들어진 바위산은 캐슬록으로 불린다.


걷기 좋은 내리막길을 버리고 좁고 가파른 계단 길을 선택한다. 미로 같은 좁은 길이 실타래처럼 얽혀 있다. 길 끝에 다다르지 않으면 다음 길의 존재를 확인할 길이 없는 길이다. 미로 속에 숨은 작은 카페와 갤러리를 지나 가파르고 좁은 계단을 또 한번 내려간다. 퀘이커 미팅하우스가 계단 아래 숨어 있다. 드디어 길을 더듬어 우리가 찾던 빅토리아 테라스Victoria Terrace에 발을 디딘다. 


빅토리아 테라스는 1800년대 초 에딘버러 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장소로 유명하다. 당시에 건설했다고는 믿기 힘든 높은 건축물과 넓은 거리 모습이 인상적이다. 빅토리아 거리는 시위가 당겨진 활대처럼 크게 휘어진다. 거리를 따라 그 시대 건축물들이 멋스럽게 서 있다. 바스에 본 크레센트 같다. 고색창연한 공간 속을 걷는 기분이 묘하다. 19세기의 한 모퉁이를 거니는 기분 좋은 착각에 빠진다. 


4.

빅토리아 거리는 글라스마켓으로 이어진다. 원래는 말과 소를 거래하던 장터였다. 정기적으로 공개처형도 집행되던 곳이다. 오래 전부터 서민과 하층민이 모이던 공간은 넓은 광장이 되었다. 여기저기서 공연이 한창이다. 광장 지분을 적절히 나눠서 사이 좋게 점유 중이다. 화이트 하트White Hart 펍을 발견한다. 에딘버러에서 가장 오래된 술집이라고 주장하는 펍이다. 하얀 수사슴 펍은 Burke & Hare라는 희대의 살인범들이 자주 드나들던 술집으로 더 유명하다. 


19세기 초, 에딘버러는 유럽에서 대표적인 해부학 연구 중심지였다. 해부학 연구용 시체는 항상 부족했다. 1828년 약 10개월간 16건의 연쇄 살인 사건이 발생한다. 시체브로커 일을 하던 버크와 해어가 연구용 시체를 찾지 못하자 결국 연쇄 살인을 벌인 것이다. 버크는 교수형에 처해졌고, 시신은 해부학 연구에 쓰이게 된다. 에딘버러 대학 해부학 박물관에는 아직도 버크의 뼈와 피부들이 전시되고 있다. 피부 가죽으로 만든 책도 있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이야기는 실제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여러가지로 버크는 참 많은 것을 남겼다. 


5.

글라스마켓과 빅토리아 거리는 해리포터와도 인연이 깊다. 해리포터 시리즈 첫 편,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을 집필했다는 the elephant house가 지척이다. J.K.롤링이 한자한자 꾹꾹 눌러썼다는 커피숍이다. Diagon Alley는 빅토리아 테라스 아래 골목길이다. 해리포터가 지팡이를 쇼핑하던 바로 그곳이다. 그럼에도 오늘 너무 긴 하루를 보낸 우리는 일정을 급히 마무리한다. 스코틀랜드 여행의 긴 여정을 생각하면 현명한 선택이다. 


그레이 프리아스 교회를 향한다. 옛날 양초를 만들던 거리였던 캔틀메이커Candlemaker Row를 오른다. 교회가 가까운 곳에서 충견 바비의 동상을 만난다. 흄의 발가락처럼 바비의 코가 황금색으로 빛나고 있다. 롤링도 여기서 소설이 성공하길 바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녀도 자주 그레이 프라이스 교회 묘지를 찾았다고 한다. 해리포터에 악당으로 나오는 ‘톰 리들’이란 이름을 Thomas Riddell이란 묘비에서 따왔다고 밝힌 바 있다. 다른 여러 캐릭터 이름도 그렇게 탄생했다. 문득 리들Riddell 가문의 입장이 궁금하다. 그들 서네임(surname)이 이런 식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이 달갑지 만은 않을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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