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 Karl Oct 30. 2022

7. 어머니 교회 세인트 자일스

1.

프린지는 시간을 잊을 만큼 즐겁다. 하지만 내 배꼽시계는 시간을 놓치는 법이 없다. 밥이라는 한 생각이 스치자 갑자기 배 속에서 허기가 요동친다. 식당은 몇 일 전에 정해 놓았다. 요크 대학 유학생이 추천한 로열 마일 맛집, 클람쉘ClamShell이다. 에딘버러에서 가까운 세인트 앤드류스 대학을 다니는 여동생이 인정하는 맛집이라는 말에 다른 곳은 염두에도 두지 않았다. 클람쉘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외관이 온통 파란색인 가게가 거기다. 분명 피쉬앤칩스 맛집으로 들었는데, 간판은 피자와 케밥을 대표로 내세운다. 


가게 안은 온통 노랗다. 메뉴판에 드러난 정체성은 또 치킨집이다. 휫비 맥파이처럼 피쉬앤칩스를 대놓고 자랑하는 곳이 아닌 것은 확실하다. 치킨과 소시지, 피쉬앤칩스를 주문한다. 점심 때를 제법 넘겼는데도 실내엔 자리가 없다. 로열 마일을 소심하게 점령한 간이 식탁에 자리가 나길 기다렸다가 얼른 차지한다. 근처 주민처럼 보이는 가족 손님과 거의 동석하다시피 좁은 자리를 비집고 앉는다. 길거리에 서서 혹은 쭈그리고 앉아서 먹지 않아도 된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스코틀랜드 사내가 대뜸 어디서 왔냐고 묻는다. 맨유 전 감독 알렉스 퍼거슨처럼 얼굴이 붉다. 요크에 산다고 했더니, 요크는 어떠냐며 또 묻는다. 너무 좋다는 대답에 사내가 웃는다. 비아냥이 조금 섞었다. 스코틀랜드에 와서 잉글랜드가 좋다는 어떻게 말할 수 있냐는 투다. 이번에는 에딘버러를 묻는다. 너무 근사하다고 답한다. 붉은 피부의 사내가 환하게 웃는다. 비아냥도 사라졌다. 단순한 성품이 마음에 든다. 


식사 중에도 전단지가 쌓인다. 커다란 해바라기를 모자와 가슴에 단 남녀들이 우리를 향해 돌진해 온다. 공연 영업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런데 얼굴을 확인하고 서로 놀란다. 한국 코미디 극단이다. 검은 정장과 모자 덕분에 고흐 해바라기처럼 샛노랗다. 의사소통을 어떻게 하냐며 대단하다 했더니 무언극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서로 한바탕 크게 웃는다. 식사를 마친다. 클람쉘은 가격도 좋고 맛도 좋다. 가난한 유학생들에게는 더 없는 맛집이 틀림없다. 


2.

프린지 페스티벌 공식 기념품샵에서 티셔츠 하나를 장만하고 다시 로열 마일로 나선다. 거리는 점점 더 사람들로 채워지고 있다. 광장 쪽 하이스트리트에는 더 많은 공연팀들이 자리를 잡았다. 하얀색, 빨간색 원피스를 입은 두 여성이 아담 스미스 동상 앞에서 춤을 춘다. 아름다운 얼굴을 심각하게 일그러뜨린 표정과 어색한 춤을 진지하게 추는 모양이 우습다. 세인트 자일스 성당 앞에는 동유럽 출신으로 보이는 남녀가 격정적인 불쇼와 칼쇼를 번갈아 연출 중이다. 길거리 공연에 등급을 매긴다면 위험 등급이다. 


불쇼와 칼쇼를 지켜보는 한 여성에게 시선이 꽂힌다. 짙은 분홍빛 헤어부터 심상치가 않다. 청바지 위로 무릎까지 올린 검은 가죽부츠와 검은 란제리 상의를 입었다. 란제리가 덮지 못한 나머지는 온통 문신이다. 오른쪽 팔뚝 안쪽에 새긴 THE FASH 문신을 발견하고 고개를 끄덕인다. FASH는 Fashionable Fashion 또는 Fast Fashion을 뜻한다. 빠르게 트렌드를 수용하는 것을 최고의 가치로 여긴다. 보는 사람보다 소비하는 주체를 최우선 가치로 생각이는 것이 패쉬의 정신이다. 그녀는 확실한 패쉬다. 그녀가 자리를 뜬다. 성당 문 앞에 놓여 있던 유모차를 끌고 유유히 갈 길을 간다. 


불쇼를 마친 여성이 검은 두건을 푼다. 풍성한 진갈색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떨어진다. 그 옆에는 이튼Eton 대학생 같은 청년이 투명한 유리 구슬로 공연 중이다. 구슬은 청년의 몸짓을 따라 유려하게 움직인다. 마치 몸을 흐르는 것 같다. 서정적이고 시적이다. 다시 그 옆에서 또다른 젊은 남녀가 공연을 준비하고 있다. 가랑이를 앉아서 찢더니 누워서도 찢고 서서도 찢는다. 스트레칭도 공연 같다. 일본 공연팀이 지나간다. 비옷을 맞춰 입고 플래카드를 들었다. 공연 제목에 체리cherry라는 단어가 눈에 띈다. 분명 붉은 비옷 컬러는 체리를 염두에 둔 선택이었을 텐데, 내 눈에는 살짝 설익은 체리 컬러다. 입 안에서 침샘이 속절없이 돋는다. 


3.

세인트 자일스St Giles 교회를 본다. 지붕 주위가 뾰족한 왕관 모양이다. 교회는 1124년에 세워졌다. 처음엔 성당cathedral이었다. 세인트 자일스가 교회로 바뀌는 역사는 스코틀랜드를 이해하는데 중요하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헨리8세에서 시작됐다. 이후 캐더린 사이에서 태어난 메리가 왕위에 올라 카톨릭으로 잠깐 회귀한다. 이 과정에서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한 메리는 훗날 ‘피의 메리’로 불린다. 그녀가 죽은 후, 이번에는 앤 블린 사이에서 태어난 엘리자베스가 왕위에 오른다(1558년). 다시 시작된 종교개혁은 스코틀랜드를 치열한 종교전쟁(1559~1560)으로 내몬다. 그 중심에 세인트 자일스가 있었다. 


어제 어셈블리 홀에서 본 존 녹스는 스코틀랜드 종교전쟁을 이끈 핵심 인물이다. 메리가 집권하자 대륙으로 망명을 떠났다가 엘리자베스 집권과 함께 스코틀랜드로 돌아온다. 그리고 추종자들을 이끌고 처음 찾아간 곳이 바로 세인트 자일스다. 이후 세인트 자일스는 스코틀랜드 종교전쟁에서 종교개혁 세력의 주요 근거지 역할을 했다. 전쟁은 의회가 교황권을 폐지하고 스코틀랜드를 개신교 국가로 선포하면서 일단락된다. 400여년간 성당으로 불리던 세인트 자일스가 교회로 바뀐 것도 그 때다. 


이후 세인트 자일스는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성지로 새롭게 탄생했다. 오늘날 전세계 장로교도들에게 세인트 자일스는 ‘어머니 교회’로 통한다. 세계 각국에서 방문객들이 끊이질 않는다. 명이 있으면 암도 존재하는 법이다. 교회 앞 광장은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개혁에 희생당한 비극의 장소이기도 하다. 광장 바닥에 조그만 하트가 새겨진 작은 벽돌들은 이런 역사를 증언하는 표식이다. 


4.

광장 한쪽 귀퉁이에 엄청난 인파가 모여 있다. 농구 청년보다 더 많은 관객을 불러 모았다. 찰리 채플린 복장을 한 사내가 느슨한 밧줄 위에서 아슬아슬하게 줄을 탄다. 어린 꼬마가 마구 밧줄을 흔들어 대는 데도 한쪽 발로 균형을 잡는 모습이 기가 막힌다. 그 와중에도 재치 있는 사내의 입담은 멈추질 않는다. 관객들이 아주 쓰러진다. 


로얄 마일 쪽에 있는 프린지 공식 광고 기둥에서 사람들이 사투를 벌이고 있다. 남자 어깨에 두 발을 올리고 몸을 길게 뻗어 포스터를 붙이는 모습이 아찔하다. 족히 4~5미터는 되는 기둥 꼭대기를 탐하는 모습이 위태롭다. 마침 아일랜드 음악이 어디선가 흘러나온다. 마음을 진정하며 길 모퉁이를 돈다. 기타와 키보드, 알토 색소폰을 연주하는 아름다운 청년들이 숨어 있었다. 데미안 라이스Demien Rice를 떠올린다. 복잡한 로열 마일을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든다. 

이전 06화 6. 아담 스미스를 잘못 독해한 결과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