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다시 세인트 앤드류스 성으로 돌아왔다. 무너진 성 가까이에 무너진 세인트 앤드류스 성당이 있다. 한쪽 면은 완전하게 남았고, 다른 한쪽 면은 완벽하게 사라지고 없다. 성당 잔해들이 드넓은 잔디밭 위에 놓여 있다. 옛 성당의 일부였던 묘비의 행렬이 바다를 향하고 있다. 그 뒤로 북해가 넘실거린다. 풍경은 마치 거대한 조각 작품 같다.
성당은 12세기에 지어졌다. 종교개혁 시기에 폐허가 된 이후, 무너진 그대로 500년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한때 세인트 앤드류스 성당은 중세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크고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었다. 팜플렛은 성당 잔해 중에 높이 33미터 타워에서 세인트 앤드류스를 한눈에 제대로 조망하라고 권한다. 그 외는 보이는 것이 전부인 무너진 성당을 굳이 입장료를 내고 들어가고 싶지는 않다.
작은 어촌 마을이 있는 곳으로 내려 간다. 어항에는 작은 배들이 가득하고 부두에는 어구들이 쌓여 있다. 부산한 항구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너무 깔끔하고 정갈해서 고기 잡는 항구가 맞는지 의심할 지경이다. 마을 끝에서 성곽을 만난다. 제법 세월이 느껴지는 성벽도 허물어진 곳 하나없이 정교하다. 정갈한 동네를 닮았다. 성곽을 따라 걷는다. 한참을 걸어도 성벽은 멋진 본래 모습을 계속 유지하며 따라붙는다. 문득 저 안은 대체 뭐하는 곳인지 궁금해진다.
정체를 확인할 안내판을 발견한다. 사립학교 세인트 레오나르드St Leonards다. 5세부터 18세 사이 학생들이 다니는 기숙학교다. 학교는 16세기 초에 만들어진 중세 성벽 안에 1877년 설립되었다. 스코틀랜드에서는 유일하게 International Baccalaureate Sixth Form을 시행하는 학교라는 자랑을 안내판 많은 부분에 할애해 놓았다. 전세계 유명 대학 진학에 필요한 공인된 자격증같은 것이다. 실력 있는 귀족 학교라는 인상이 물씬 풍긴다.
2.
재미있는 건물이 나타난다. Byre 극장이다. 남녀노소 장르불문 공연과 이벤트가 펼쳐지는 문화공간이다. 예쁘게 꾸민 식당이 공간의 매력을 더한다. 예정에 없던 식사를 잠깐 고민하다가 구시가를 향한 걸음을 옮긴다. 작고 앙증맞은 예쁜 집 앞에서 다시 걸음을 멈춘다. 벽에 걸린 작은 명판은 D’Arcy W Thompson이라는 사람이 30년 동안 여기 살았고, Naturalist Scholar로 그를 소개하고 있다. 톰슨이 자연에서 찾은 수학적 아름다움과 기초들은 생물학자 뿐만 아니라 수학자와 철학자들에게도 큰 영감을 주었다는 평가를 곁들여 놓았다. 영감을 받았다는 이들 중에는 컴퓨터의 아버지로 불리는 앨런 튜링Alan Turing도 끼어 있다.
미로 같은 길을 요리조리 걷는다. 좁은 골목이 열리더니 세인트 앤드류스 구시가가 모습을 드러낸다. 전형적인 구시가 모습을 생각하며 한적하고 조용하리라는 섣부른 전망이 보기 좋게 무너진다. 마켓 스트리트Market Street 일대가 들썩이고 있다. 회전목마와 각종 놀이기구들이 우리보다 앞서 중세 작은 마을을 점령했다. 내 눈에는 조악하기 짝이 없는 놀이기구들인데 여기 모인 사람들은 하나같이 즐거운 얼굴들이다. 자본주의 발명국에 사는 가장 덜 자본주의적인 사람들 같다는 아이러니가 흥미롭다.
가장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 철봉에 2분 동안 매달리면 현금을 주는 단순한 놀이를 구경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다. 쉬운 미션 같은데 의외로 성공하는 이가 없다. 웃으며 나왔던 사람들이 고개를 떨구고 돌아선다. 그때마다 구경꾼들은 박장대소하며 깔깔거린다. 미니언즈와 겨울왕국 엘사 인형을 뽑는 놀이도 인기다. 아이들 손에 이끌린 부모들이 제법 줄을 섰다. 아이를 이길 부모는 스코틀랜드에도 없는 모양이다.
3.
마켓 스트리트가 도로와 만나는 곳에 멋진 정원을 가진 중세 건축물이 멋스럽다. 아우라가 예사롭지 않다. 이런 경우엔 안내문을 빨리 읽는 게 정답이다. 역시 범상치 않은 곳이다. 그 유명한 홀리 트리니티 교회Holy Trinity Church다. 1559년 존 녹스가 열정적인 설교를 펼친 곳이다. 설교는 종교개혁에 대한 스코틀랜드 민중들 가슴에 응축되어 있던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트리거로 작동했다. 훗날 홀리 트리니티 교회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출발점으로 역사에 기록되는 계기였다.
교회 정원에는 아름다운 꽃들이 만발해 있다. 이렇게 다양하고 많은 꽃들로 가득한 정원은 처음 본다. 12세기 건축물이 풍기는 빈티지한 컬러가 형형색색 꽃과 어우러져 교회 전체에 묘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정원을 뒤덮은 저 꽃들은 종교개혁에 목숨을 던졌던 민중들을 위한 헌화가 아닐까? 그렇다면 저 소박한 건축물은 그들을 위한 재단이 아닐까?
곧이어 또 하나의 생각이 뒤따른다. 존 녹스의 설교 이후, 몇 해가 지난 어느 날, 세인트 앤드류스 성당은 폐허가 되었다. 독립적으로 보이던 것들이 연결되어 인식되는 순간, 새로운 많은 의미들이 생겨나는 법이다. 여기 트리니티 교회를 꾸민 멋진 정원과 저기 세인트 앤드류스 성당의 황폐함은 역사 속 아이러니를 보여주듯 슬픈 대조를 이룬다. 누군가의 성공은 누군가의 실패를 딛고 완성되는 경우가 많다. 역사의 진보라는 당위에서 한발 물러나면, 또다른 누군가의 희생을 발판삼은 아름다운 꽃의 정원이 마냥 거룩하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4.
허기가 우리를 식당으로 내몬다. 꽃의 정원이 보이는 곳에서 마르게리따와 피쉬앤칩스, 그리고 비프앤나쵸를 주문한다. 비프도 알고 나쵸도 알지만 비프앤나쵸는 처음 본다. 시원한 맥주 한잔이 간절하지만, 숙소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과분한 욕망에 불과하다. 주문한 음식들이 식탁을 채운다. 비프앤나쵸부터 살핀다. 비프와 나쵸와 피클과 토마토와 치즈가 범벅인 국적불명의 비주얼이다. 맛은 나쁘지 않다.
세인트 앤드류스 인근에 있는 던디Dundee로 차를 몬다. 내일은 하이랜드 주도, 인버네스Inverness까지 단번에 올라가는 만만치 않은 일정이다. 이동 거리와 시간을 가능한 줄이려고 던디 외곽에 숙소를 잡았다. A91 국도로 에덴Eden 강을 건너고, A92로 테이Tay 강을 건넌다. 테이 강은 강보다는 만에 가깝다. 내륙으로 깊이 비집고 들어온 북해 한자락처럼 보인다. 바로 그 한자락 끝에 형성된 도시가 던디다.
던디는 바다와 면한 덕분에 12세기 후반부터 무역항으로 이름을 떨쳤다. 영국에 있는 거의 모든 도시가 그렇듯 산업혁명을 거치며 급성장했다. 특히 19세기에는 삼베 원료가 되는 항마 산업의 세계적인 중심지였다. 지금도 스코틀랜드에서 4번째로 큰 도시다. 던디는 켈트어로 ‘불의 요새’라는 뜻을 가진 멋진 이름이다. 외곽도로를 타고 도시를 크게 돈다. 불의 요새를 하릴없이 지나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너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