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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Karl Oct 30. 2022

16. 날개 달린 신화와 전설의 섬

1.

산길을 넘는다. 포트 아우구스투스에서 더없이 청명하던 하늘이 한순간에 변한다. 안개와 비와 바람이 동시에 덮친다. 산길을 넘어 강변에 이르러서도 험한 날씨는 따라붙는다. 세상에 필터를 씌운 것처럼 모든 것이 칙칙해 보인다. 길가 절벽과 계곡조차 실루엣으로 보인다. 거친 수묵화 같다. 마치 천국으로 가는 것처럼 환상적이라는 스카이섬 가는 길이 오늘은 왠지 몽환적이기만 하다. 


맹렬히 와이퍼가 빗줄기를 훔친다. 길과 길이 아닌 것만 간신히 구분하며 한 시간째 차를 달린다. 핸들을 얼마나 움켜 잡았던지 팔과 어깨가 저린다. 여전한 비와 바람 속이지만, 안개는 조금 옅어지고 있다. 안개 속에서 물 위에 떠있는 그림 같은 에일린 도난Eilean Donan 성이 형체를 드러낸다. 성은 호수 세 개(두이치, 알쉬, 롱 호수)가 만나는 지점에 자리를 잡았다. 우리나라 작명법으로는 세물머리다. 


성으로 가는 유일한 돌다리를 비를 뚫고 건넌다. 백여 미터나 되는 다리는 사람들이 교차해서 지날 만큼만 넓다. 그 마저도 구불구불하다. 성은 요새처럼 견고하다. 공격은 몰라도 방어는 최적이다. 그런 까닭이었을 것이다. 작은 돌섬은 6세기부터 사람이 거주했었다. 여기에 처음 성을 세운 것은 13세기 중반이다. 이후 적어도 4번 이상 다른 버전으로 리모델링했다.


현재 도난 성 모습은 비교적 최근인 1911년에 복원한 것이다. 자코바이트 봉기로 파괴된 이후, 성은 200여년간 폐허로 방치됐다. 도난 성을 도난 성 답게 만든 것은 맥래MacRae 가문이다. 지금도 4대째 성을 관리하고 있다. 도난Donan은 580년경 아일랜드에서 건너온 주교 이름에서 유래했다고 전해진다. 실제로 이 지역에는 도난 주교에게 바쳐진 여러 교회들이 있다. 


에일린 도난 성을 예술적이다. 호수 위 바위섬 위에 떠있는듯 자리하고 있다. 덕분에 하이랜드는 물론 스코틀랜드 전역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장소로 손꼽힌다. 자연의 일부처럼 세물머리 한가운데 원래 존재하던 것처럼 완벽하다. 007 시리즈를 포함한 많은 영화들이 도난 성을 영화 촬영지로 낙점하는 이유다. 오늘은 몹쓸 날씨 탓에 우리 밖에 없지만, 평소에는 수많은 관광객이 줄을 잇는 명소다. 


2.

비와 바람 속에서 성을 구경한 것이 불과 10분 전이다. 거짓말처럼 비와 바람이 걷히고 안개가 물러간다. 아름다운 알쉬 호수가 눈에 맑게 담긴다. 짙은 안개가 사라진 길에 숨었던 대자연이 깨어난다. 천국으로 가는 환상적인 길은 카일Kyle 마을로 향한다. 포트 아우구스투스를 벗어나 처음 만나는 마을다운 마을이다. 소품처럼 한두채 집들만 있던 그런 곳이 아니다. 주유소도 있고 음식점도 있다. 


스카이섬이 힐끗 모습을 드러낸다. 카일 마을에서 스카이브릿지Skyebridge 까지는 금방이다. 스카이브릿지는 우리나라 거가대교처럼 작은 섬, 에일린 반Eilean Ban을 쉼표처럼 딛고 스카이섬을 연결한다. 작은 섬까지는 마치 국도 같다. 길 옆 돌담이 하얀 철제 난간으로 잠깐 바뀌더니 다시 돌담이다. 작은 섬에서 스카이섬으로 가는 구간은 전혀 다르다. 마치 높은 언덕을 오르는 것 같다. 그 정점에 다다를 때까지는 하늘로 쉼없이 더 올라갈 것처럼 착각할 정도다. 지상 낙원으로 가는 작은 의식 같다. 


오래전 읽었던 신문에서 글쓴이는 주장했었다. 스카이섬은 세상에서 가장 신비롭고 아름다운 절경을 지녔고, 세상 어디에도 없는 신비하고 독특한 자연 경관으로 가득하며, 오직 하늘이 허락한 세상 같다고. 덕분에 오래전 나에게 스카이섬은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다른 차원의 세상이었고, 지상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천상의 공간이었다. 지금 그곳으로 들어간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차다. 


사실 스코틀랜드 여행에서 하이랜드 여행은 쉽지 않다. 설령 하이랜드를 여행하더라도 스카이섬 여행은 또다른 결심을 필요로 한다. 오래전 나를 매료시킨 신문 글을 읽지 않았다면, 굳이 며칠을 더하는 일정과 수고를 들여 스카이섬을 여행하겠다는 생각은 못했을 것이다. 스카이섬은 게일어로 ‘날개 달린 섬’이다. 삐쭉 빼쭉 들쭉날쭉한 해안선 모양을 빗댄 이름이다. 얼마전까지도 나는 당연히 ‘하늘 섬’인줄 알았다. 


3.

숙소는 섬의 맨 끝자락이다. 날개깃에 만든 해안도로를 달린다. A87 도로가 해안을 두어 번 돌더니 낯선 풍경을 펼친다. 나무도 없는 산이 눈앞에 봉긋 솟았다. 옛 고분이 수천수만배로 자란 것 같은 산들이 켜켜이 끝도 없이 솟아 있다. 입이 쩍 벌어진다. 날 것 그대로다. 스카이섬을 신화와 전설의 땅이라 부르는 수사는 이런 풍경에 찰떡같이 들어맞는 정확한 표현이다. 


봉긋한 산을 요리조리 헤집으며 나아간다. 산 아래를 한동안 더듬던 길이 다시 해안을 향한다. 해안을 너댓번 휘감아 돈다. 어김없이 다른 시대, 다른 세상 풍경이 따라붙는다. 경외심이란 것이 마음 속에 깃든다. 내가 한없이 작아지는 순간에 찾아온다는 그것이다. 잔잔히 비가 떨어진다. 바람이 불고, 구름이 움직인다. 모든 것이 신비롭다. 변덕스러운 날씨도 극적인 풍광을 감추지는 못한다. 거친 듯 차분하고 황량하지만 안정적이다. 


4.

우리만 존재하는 것 같던 세계에 휴게소가 나타난다. 낮은 나무 벽체 위로 넓은 지붕을 올렸다. 붉은 벽체와 검은 지붕이 1대 1 비율이다. 차안에서는 불안정해 보이더니 실제로는 균형 잡힌 단단한 건물이다. 휴게소 아래 예쁜 바닷가 마을이 해안을 따라 그림처럼 터를 잡았다. 음식을 주문하고 식탁에 앉는다. 조금 전 바닷가 마을이 그림같이 식당 창에 걸려 있다. 창밖에는 여전히 비가 내린다. 


기념품 가게에 들른다. 아기자기한 것들이 많지만 내 취향은 아니다. 휴게소 앞에 제법 큰 종Bell이 눈길을 끈다. 스카이섬 북쪽 해안에서 좌초된 프랑스 배에서 인양한 것이다. 네덜란드에서 1630년에 만들었다는 종은 400년이 지난 오늘 이곳에 장식품으로 걸려 있다. 세상 일은 아무도 모르는 것이다. 예술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대단할 것 없는 남의 나라 종을 여기에 둔 까닭을 밝힌 명판은 따로 없다. 


식당과 이웃하는 다른 건물에는 아로스AROS라는 조그만 간판이 걸려 있다. 커뮤니티 극장 같은 곳이다. 내가 휴게소라고 생각한 곳이 여기에 딸린 부속 공간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는다. 아로스는 스카이섬 문화생활에 허브 역할을 하는 곳이다. 영화와 공연, 전시 등 각종 엔터테인먼트가 펼쳐진다. 그림 같은 예쁜 바닷가 마을 포트리Portree와 숙박을 연계한 패키지 상품이 팜플렛에 한가득이다. 긴 하루를 보낸 오늘 같은 날, 또다시 캠핑을 하려니 머리가 지끈거린다. 아쉽다. 


5.

오늘의 숙소, Skye Camping and Caravanning Club은 날개 달린 섬 끝에 있는 날개깃 사이로 바다가 아주 깊숙히 들어온 해안가에 위치를 잡았다. 산 아래 평평한 들판이 바다까지 계속된다. 캠핑장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라는 아무런 경계가 없다. 제일 그럴싸한 아무 곳에 자리를 잡는다. 이제 막 해가 떨어지기 시작한다. 


여기는 아침에 떠나온 인버네스와 위도상 비슷한 위치다. 아래로 실컷 내려갔다가 다시 한참을 올라온 하루였다. 스코틀랜드 북서쪽 끝에 우리가 와있다. 세상의 끝에 다다른 것 같은 생각에 기분이 멜랑꼴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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