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던툴름 성 너머 A855 국도는 주상절리 박물관이다. 해안 가까이에 솟은 주상절리는 내륙까지 완만한 구릉을 이루고 있다. 내륙은 더 기묘한 전경이다. 완만한 구릉에서 솟은 주상절리가 여기저기 산을 이루고 있다. 어떤 것은 산 꼭대기를 평평하게 만들어 놓았고, 어떤 것은 봉긋한 산 정상 아래를 기둥처럼 받치고 있다. 변화무쌍한 주상절리의 향연이 거대한 산을 철옹성처럼 꾸며 놓았다. 공룡이 살았던 쥐라기나 백악기로 시간을 돌려 놓은 것 같다.
산을 넘자 내리막길이 시작된다. 시간 여행에서 돌아온 길은 점점 평평해진다. 어느새 주변은 평온하게 변해 있다. 낮은 구릉이 잔디로 물결친다. 하나 둘 집들도 보인다. 호숫가를 달리던 도로가 호수를 둘로 쪼갠다. 작게 쪼개진 호수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 목적지로 향한다. 스카이섬 전망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다는 킬트 락Kilt Rock과 밀트 폭포Mealt Falls다.
명성에 비해 모든 것이 허술하다. 이정표도 부실하고 주차장도 변변찮다. 엉성한 공터에 엉성하게 주차한다. 엉성한 공터에는 엉성한 푸드 트럭도 있다. 과연 움직일 수 있을지 궁금하다. 엉성한 나무 출입문을 지난다. 제법 넓은 공간 끝에 엉성한 전망대가 보인다. 그러나 전망대에서 보는 바다는 전혀 엉성하지 않다. 바다 건너 스코틀랜드 본토가 또렷이 보인다. 던툴름 성을 지나 섬의 동쪽면을 제법 달려온 까닭이다.
전망대에서 바다에 이르는 아득한 높이가 아찔하다. 해안 절벽은 북쪽 끝에서 남쪽 끝까지 끝도 없이 뻗었다. 저 멀리 킬트 락이 보인다. 반듯한 세로 결이 선명하다. 흡사 킬트 주름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한동안 킬트 락에 머물던 시선을 가까운 쪽으로 옮긴다. 수평으로 흐르던 물이 55미터 주상절리 아래 바다로 수직 낙하한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대지를 적시던 지천들이 밀트 호수로 모여들고, 거기서 잠깐 휴식을 취한 물들이 바다로 몸을 던진다.
바다로 향하는 물의 본성을 이렇게 대놓고 보여주는 장면은 처음 본다. 충분한 수량이 까마득한 높이로 떨어지는 폭포는 거대한 포말을 일으키며 바다와 만난다. 폭포의 마지막 생애를 목도하는 것만으로도 여기는 귀하고 보물 같은 장소다. 마침 샛노란 수륙양용 비행기 한 대가 파란 하늘을 가르며 킬트 락을 향해 날아간다. 마치 영화 속 풍경 같은 연출이다.
2.
전망대 중앙에 있는 안내판을 읽는다. 킬트 락과 밀트 폭포 이야기를 기대했는데, 뜬금없이 티라노 사우르스가 그려져 있다. 이곳이 스코틀랜드 대표 공룡 유적지라는 설명이 뒤따른다. 스타핀Staffin에서 공룡 발자국이 처음 발견된 것은 1982년이다. 2004년에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공룡 발자국이 발견되었다.
공룡이라는 새로운 발견도 흥미롭지만, 내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따로 있다. 안내문에 적힌 9라는 숫자다. 9가 있으려면 1도 있어야 한다. 어렵게 수수께끼를 푼다. 여기서 북쪽에 있는 Flodigarry 마을부터 남쪽 Old Man of Storr에 이르는 15마일 지역이 에코뮤지움Ecomusium으로 지정 관리되고 있다. 고유 숫자를 가진 명소가 13곳이나 된다. 그 중 하나가 9라는 숫자를 부여받은 이곳이 스타핀이다.
에코뮤지움이 숫자를 부여한 지역은 독특한 지형적 특색을 가졌거나, 동식물의 보고거나, 공룡같은 고고학적 가치를 지녔거나, 섬 고유의 문화가 남았거나, 또는 하이킹이나 트레킹으로 유명한 곳들이다. 각 명소들은 하나 이상씩 선정 이유들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가 9번이니 1번부터 8번까지 명소는 이미 지나쳐 버렸다. 주상절리 박물관 같다며 연신 감탄사를 쏟던 그곳들이 1에서 8까지의 숫자들이었던 모양이다.
에코뮤지움이란 발상이 신선하다. 슬로건도 낭만적이다. There is no roof, just the sky above it(‘지붕 없는 하늘 아래 박물관). 그 낭만을 흉내 내어 푸드 트럭에서 한끼를 해결한다. 지붕 없는 하늘 아래 식당이다. 식당 이름은 The Black Sheep,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검은 양이다. 햄버거 세트 4개와 스프 2개를 주문한다. 햄버거 세트가 4파운드, 홈메이드 야채 스프가 2.5파운드다.
호숫가 엉성한 벤치에 앉아 식사를 한다. 벤치 주변은 완만하고 평평하다. 잎이 두툼한 키 작은 식물이 벤치 옆에 군락을 이루고 있다. 크림색 양들이 그 속에 흩어져 풀을 뜯는다. 맑던 하늘이 갑자기 칙칙해진다. 급기야 비와 안개를 미스트처럼 뿌려 댄다. 하늘 아래 식사는 멈추고 차 안에서 남은 식사를 마친다.
3.
올드 맨 오브 스토르Old Man of Storr로 이동한다. 계획할 때는 몰랐던 에코뮤지움 13번째 명소다. 10번과 11번, 12번은 건너뛴다. 10번과 12번은 해안가 풍경이다. 해안도로를 따라 이동하며 즐기면 된다. 11번은 The Diatomite Road다. 해안가부터 Cuithir 호수까지 가는 하이킹 코스다. 13번, 올드 맨 오브 스토르는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바위산이다. 바위산 꼭대기 바위가 노인 얼굴을 닮아 올드 맨이란 이름을 얻었다.
도로는 바다와 산을 왼쪽과 오른쪽으로 나눈다. 산 아래에서 바다까지는 경사가 완만하다. 시야가 트여 상쾌하다. 구불구불하던 해안도로가 직선으로 펴진다. 그제서야 산 정상이 보인다. 13번 명소로 가는 주차장도 엉성하긴 마찬가지다. 바닥을 흙으로 덮은 졸음 쉼터 분위기다. 엉성한 돌탑을 지나 엉성한 문을 통과한다.
초입은 밋밋하다. 나무 잔해들이 어지럽게 널린 것이 눈에 거슬린다. 언덕 하나를 오른다. 본격적인 산행이 시작되고, 아내와 아이들은 살짝 뒤쳐진다. 얼마나 올랐을까? 잠깐 돌아서는 순간, 헉!하는 소리를 짧게 뱉는다. 바다와 섬과 또 바다와 섬이 수도 없이 겹쳐 있다. 바다 위 섬처럼 하늘의 구름도 소실점 끝까지 뻗어 있다.
노르웨이어로 돌섬(rocky island)이란 뜻을 가진 로나Rona 섬과 라세이Rassay 섬, 그 너머 스코틀랜드 본토 서부 해안이 연출한 놀라운 풍광은 에코뮤지엄 12번 명소다. 13번을 오르다 이렇게 멋진 12번을 감상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대자연이 빚은 황홀한 풍경은 우리를 미동도 없이 넋을 놓고 한참을 서있게 만든다.
산을 더 오른다. 이름모를 작은 호수가 산 안쪽에 폭하고 안겨 있다. 두터운 구름을 뚫고 호수를 비추는 햇살이 상서롭다. 작은 호수 뒤로 12번이 한번에 담긴다.
4.
두번째 산문을 지난다. 가파른 산길 끝에 거대한 절벽이 위압적으로 솟아 있다. 산문은 또다른 세계로 들어가는 경계 같다. 몸이 저절로 긴장한다. 아내를 밀고 당기며 태고적 자연을 함께 오른다. 천 길 절벽 같은 주상절리가 우리를 한없이 왜소하게 만든다.
여기는 빙하가 만든 지형이다. 우뚝한 절벽과 가파른 계곡, 피오르드 해안은 빙하 작용의 증거들이다. 또 여기는 화산이 만든 지형이다. 24겹의 화산암층이 300미터 두께로 쌓여 있다. 산 정상(719미터)까지 절반은 화산암 지분이다. 변변한 나무가 없는 이유다. 낯선 공간에 공포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마침 13번이 나타난다.
올드 맨 오브 스토르는 대여섯 개 거대한 바위덩어리들의 집합이다. 그 중 가운데 뾰족하게 솟은 46미터 바위는 재미난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1890년 바위 근처에서 은과 동전이 발견된다. 935년에서 940년 사이 것으로 추정되는 동전들이었다. 바이킹들이 숨긴 것이 분명했다. 당시 노르웨이인들이 이곳에 정착했다는 많은 기록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북유럽인들에게 이곳은 낯익은 환경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산정상 46미터 바위는 보물을 숨기기에도, 다시 찾기에도 유용한 이정표였을 것이다. 그들은 여기에 ‘바위가 크다’는 노르웨이어, 스토르Storr라는 이름을 붙였다.
5.
하루를 마감하며 포트리Portree를 들른다. 스카이섬에서 가장 관광객 친화적인 마을이다. 엉성한 것이 없다. 가게와 편의시설, 레스토랑 같은 문명이 여기에는 있다. 스카이섬 명물이라는 사슴 요리를 맛보고 싶지만, 둘째 성화에 돼지고기를 산다. 포트리를 가장 아름답게 볼 수 있다는 보스빌 테라스Bosville Terrace에서 풍경에 취한다. 작은 항구를 따라 호텔과 식당들이 100여미터 즐비한 모습은 포트리를 상징하는 이미지다. 그 풍경을 담은 작은 도자기 타일을 하나 장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