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스카이섬 여행 마지막 날이다. 어제까지는 섬 동쪽을 훑었다. 오늘은 섬 서쪽을 돌고 포트 윌리엄Fort William까지 이동할 예정이다. 어젯밤 맥주만 붓고 삶은 돼지 수육을 어찌나 맛있게 먹었던지, 아침은 간단하게 해치운다. 텐트는 그냥 말아서 차에 던져 넣고 캠핑장을 나선다. 그런데 난생 처음보는 양들이 도로에 나타났다. 머리와 발은 까맣고 몸통만 하얗다. The Black Sheep,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거라 단정한 검은 양이 눈 앞에 있다. 스타핀의 푸드 트럭 주인장께 심심한 사과를 전한다.
섬 서쪽은 동쪽과 완전 다른 풍경이다. 동쪽이 남성적이라면 서쪽은 여성적이다. 동쪽이 드라마틱하다면 서쪽은 서정적이다. 구릉 같은 낮고 완만한 산들이 편안하다. 사이사이 일정한 간격을 두고 점처럼 박힌 하얀 집들도 인상적이다. 융프라우 아래 그룬덴발트를 떠올리는 매력적인 전원 풍경이다. 어느새 던버간 성Dunvegan Castle 성벽이 길가에 나타난다.
던버간 성은 무려 800년 동안 맥레오드 부족장들이 거주해 온 곳이다. 27대 부족장이 1933년부터 종가집을 개방하기 시작했다. 전문가 손길이 느껴지는 심볼을 따라가서 차를 주차한다. 매표소 앞 사람들 행렬이 심상치가 않다. 스카이섬에서는 한번도 본 적 없는 낯선 광경이다. 주말이라 고개를 끄덕이다가 너무 이른 시간이라 고개를 갸우뚱하게 한다. 던버간 성을 과감히 포기한다. 자칫 일정이 꼬이면 본토로 가는 여객선을 놓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종가집 구경은 접었으니 네이스트 포스트Neist Point에 가자고 아내를 꼬드긴다. 망망대해로 길게 뻗은 절벽 끝에 하얀 등대(1909년)가 그림같은 풍경을 연출하는 곳이다. 아내는 단박에 고개를 젖는다. 여객선 시간에 쫓기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하필 스카이섬 서쪽 끝에 위치한 것이 문제다. 한번 더 달래보지만, 아내는 꿈쩍도 않는다.
2.
톰톰에 던 비그Dun Beag를 찍는다. A863 국도 풍경은 요크 교외 풍경을 닮았다. 도로가 구릉을 따라 오르고 내려간다. 긴 털과 긴 뿔을 가진 해미쉬 무리를 못 봤다면, 여기가 스코틀랜드란 사실을 깜빡할 뻔했다. 언덕 너머 요크에는 없는 바다 풍경이 멋지다. 바다와 평원을 반반으로 가르는 길은 구불구불 울퉁불퉁하다. 순간 높은 평원지대에 반쯤은 무너진 거석 구조물이 나타난다. 던 비그 브로흐Dun Beag Broch다.
주차장에서 브로흐로 가는 길이 만만치 않다. 질척이는 진흙과 가축 배설물을 요리조리 피하며 구조물 아래에 이른다. 다시 가파른 언덕을 기다시피 오른다. 브로흐 뒤는 완만하지만 높은 구릉이, 앞은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바다가 펼쳐진다. 브로흐는 내부와 외부에 이중 벽을 가진 둥근 형태의 선사시대 석조 구조물이다. 스코틀랜드 몇몇 섬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주거양식이다.
맨 아래 지름은 18.6미터, 위로 갈수록 지름이 줄어드는 안정적인 구조다. 18세기 기록은 무너진 외벽 높이가 4미터에 달했다고 전한다. 외벽과 내벽 사이는 아래위를 오르내리는 공간이다. 계단은 지금도 남아있다. 내부 공간을 어떻게 사용했는지는 아직 논쟁 중이라고 한다. 연구자들은 층을 나눠 공간을 다양하게 활용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생활 공간이면서 가축도 키우고, 식량 창고 역할로도 쓰였다는 주장이다. 내벽 지름이 11미터다. 어떤 것도 가능한 충분한 공간이다. 이른바, 던 비그 브로흐는 선사 시대에 지어진 복층 구조를 가진 연립주택이다.
계단을 올라 평평한 공간에 자리잡고 앉는다. 2,300여년 전에 지어진 건축물을 생각한다. 고대와 중세, 근대를 지나 이렇게 존재한다는 것이 신비롭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거쳐 갔을 것이다. 브로흐는 홀로 평야지대 중앙에 봉긋 솟아 있다. 위치는 곧 권력이다. 전체를 한눈에 지켜보는 위치는 주변에 대한 지배력과 통제력을 강화하는 힘이 있다. 오랫동안 뺏고 뺏기는 고단한 시간을 견뎠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은 의미가 다르다. 아름다운 풍경을 가진 장소일 뿐이다. 먼 옛날엔 감시와 통제의 뷰였지만, 지금은 그저 조망의 뷰다. 물론 뷰에도 값을 매기는 시대에 살고 있기는 하다.
3.
여객선 선착장이 있는 아머데일Armadale로 출발한다. 던 버건 성을 건너뛴 덕분에 시간이 남는다. 선착장에서 가까운 아머데일 성을 들른다. 여기는 하이랜드 역사에 막강한 영향을 끼친 도날드Donald 부족 본거지다. 거의 400년간 스코틀랜드 서부 해안을 통치했다. 그들은 왕들에 도전할 만큼 크고 강력한 제국을 형성했었다. 아머데일 성은 이런 명성에 비해 소박하다. 성보다는 조금 큰 저택에 가깝다.
전혀 다른 스타일을 가진 저택 두 개가 이웃하며 서 있다. 하나는 1790년대에 지은 농가 저택이고, 다른 하나는 1815년 완성한 Scottish Baronal Style의 대저택이다. 이곳은 도날드 가문이 소유했던 마지막 땅이었다. 전세계로 흩어진 부족 후손들이 아머데일 성을 다시 매입한 이유다.
그리고 Clan Donald Lands Trust를 설립하고 여기를 본부로 삼았다(1971년). ‘Our Mission’이 저택 안 벽면에 적혀 있다. ‘우리는 스카이섬에 있는 부족과 부족의 전통, 역사, 땅과 소유지를 보존하고 보호하며 홍보하는 일을 한다. 이를 통해 전세계로 흩어진 부족 구성원과 대중 사이에 물리적, 지적 접촉을 향상시키는 것을 목표로 한다.’
4.
아머데일 페리터미널Armadale Ferry Terminal은 한산하다. 아직도 시간이 제법 남았다. 차량 서너 대 뒤에 우리도 줄을 선다. 선착장이 보이는 작은 식당 야외 식탁에 자리를 잡는다. 아내와 준하는 피쉬앤칩스와 페페로니 피자를 주문하러 가고, 나와 준서는 바다를 구경한다. 바다 위를 떠다니는 요트와 카약이 여유롭다. 아내와 준하가 돌아온다. 매콤한 피자와 담백한 피쉬앤칩스, 조합이 나쁘지 않다. 생선은 보통 대구를 쓰는데 여기는 특이하게도 가재미다. 담백한데 약간 텁텁하다.
아이들은 콜라캔 세우기 삼매경에 빠졌다. 한모금 마시고 세우고, 또 마시고 세우기를 반복한다. 저런 사소한 것에 저런 재미와 즐거움을 느끼는 인생이 부럽다. 멀리서 부드러운 굉음이 들린다. 점점 가까워진다. 할리Harley-Davidson 소리다. 오토바이 이십여대도 바다를 건너려고 제법 길어진 차량 행렬 뒤에 멈춘다. 헬멧을 벗는다. 모두 노인들이다. 몇몇은 80대 같다. 가죽 자켓과 스카프로 치장한 모습이 귀엽고 멋지다. 탐나는 인생이다.
선착장 주변을 걷는다. 작은 기념품 가게와 도자기 상점도 구경한다. 숲으로 가는 작은 길에서 만난 집이 너무 예쁘다. 따로 대문도 없다. 입구에 세운 말뚝에 ‘Private’이라 적은 큼직한 푯말을 보고 멈칫한다. 나 같은 관광객이 꽤나 들락거렸던 모양이다. 별채로 보이는 작은 초록색 나무집은 꼭 한번 내 손으로 짓고 싶다는 결연한 생각을 할 만큼 내 맘에 쏙 든다. 작은 길은 Woodland Walk라는 작은 오솔길로 향한다. 잠시 다녀올 시간이 여의치 않다.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