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an Karl Oct 30. 2022

21. 대영제국 아웃도어 수도,
포트 윌리엄

1.

어제는 긴 하루였다. 스카이섬 서쪽을 훑고, 배도 타고, 고가교에서 제법 멀리 걷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먼 길을 달려 포트 윌리엄에 도착한 것은 늦은 저녁이었다. 시내에서 식사를 마치고, 숙소인 프리미어 인에 도착한 것은 밤이 깊어서였다. 이미 하루를 마감한 직원의 날선 응대를 타박할 힘도 없었다. 몸은 이미 늘어지고 있었다. 침대에 벌렁 누워 이대로 잠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런데 침대가 하나 부족했다. 분명히 엑스트라 침대 두개를 신청했었다. 하지만 방에는 더블 침대와 엑스트라 침대가 하나뿐이었다. 프론트에서 사라진 직원을 어렵게 찾아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해결할 의지가 없는 직원은 지금은 해결할 방법이 없다는 대답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그녀만큼 하루를 마감하고 싶었던 우리는 오늘로 2차전은 미루고 잠을 청했었다. 


아침이 밝았다. 조식으로 파이팅을 충전하고 다시 프런트로 향한다. 지난 밤 상황은 전해 들은 모양이다. 매니저는 연신 미안하다는 소리만 반복한다. 아내는 그런 태도에 더 화가 돋는 모양이다. 솔루션을 제안하라고 강하게 요구한다. 아내가 승리한다. 숙박료 전액을 환불하겠다며 매니저가 무릎을 꿇는다. 방으로 돌아온 아내가 웃는다. 아내는 어제와 오늘 상황을 인종차별적이라 느낀 모양이다.  


2.

한번 더 포트 윌리엄 구경을 나선다. 숙소에서 시내는 산책하듯 걸을 수 있는 가까운 거리다. 하지만 오늘 여정도 만만치 않다. 시간과 체력을 아껴야 한다. 커다란 라운드어바웃을 지난다. 길가에 푸른 잔디밭이 바다를 향해 넓게 뻗어 있다. 예전에는 윌리엄 요새Fort가 있던 자리다. 지금은 허물어진 성곽 일부만 남았다.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이 옛 요새에 북적이고 있다. 


윌리엄 요새는 크롬웰Cromwell 군대가 1654년에 건설했다. 크롬웰은 청교도 혁명으로 불리는 영국 내전England Civil Wars에서 왕당파를 물리치고 공화정을 수립(1651년)한 인물이다. 요새는 왕당파 중심지였던 스코틀랜드를 방어할 목적이었다. 특히 인근에 있던 하이랜드 부족들을 견제하는 성격이 강했다. 내가 좋아하는 영드, <아웃랜드>에서 글렌의 일원인 클레어가 잭 랜들에게 잡혀간 곳이 여기다. 잔디에 없는 요새를 그려본다.


예나 지금이나 포트 윌리엄은 하이랜드 중심 도시다. 규모는 인버네스 다음 두 번째지만, 지리적 위치는 으뜸이다. 군사적 요충지로 쓰임새도 많았다. 칼레도니안 운하 남쪽 끝에 위치해서 대양으로 나가는 관문이었고, 글라스고에서 하이랜드로 가려면 여기를 통과해야 한다. 인버네스가 66.2마일, 포트 아우구스투스는 직선도로로 31.5마일 밖에 안된다. 그런데 우리는 광화문에서 분당 정도를 오는데 4일이 걸렸다.  


3.

포트 윌리엄 시내는 소박하다. 200미터 남짓 곧게 뻗은 예쁜 거리가 전부다. 예쁜 길 한쪽 끝에 차를 세운다. 길은 작은 광장으로 시작한다. 꽃들이 만발한 작은 화단이 방문객들을 미소 짓게 만든다. 화단 안에 있는 하얀 푯말이 여기가 ‘The End of the West Highland Way’(웨스트 하이랜드 길의 종착지)라고 알려준다. 웨스트 하이랜드 길은 글라스고에서 포트 윌리엄에 이르는 96마일 아름다운 길이다. 


화단 앞 벤치에는 머리가 벗겨진 나이 지긋한 노인이 등산화를 신은 채 오른 다리를 왼 다리에 올려놓고 주무르는 청동 동상이 앉아 있다. 먼 길을 걸어온 고단함이 조각상에 고스란히 담겼다. 준하준서가 노인과 같은 포즈를 취하고 앉는다. 카메라 앵글에 그 모습을 담는다. 이름이 포트 윌리엄이 된 사연을 밝힌 안내글을 읽는다. 감성적인 광장 분위기와 대비되는 건조한 글이다. 


스코틀랜드 군주, 윌리엄II세가 그 주인공이다. 그는 네덜란드 독립전쟁(1568년)을 이끈 Orange Nassau 왕조 출신 군주였다. 사람들은 그들 오렌지 윌리엄William of Orange이란 애칭으로 불렀다. 오늘날 네덜란드 대표 컬러가 오렌지가 것도 이 왕조에서 기원했다. 윌리엄II세의 아내, 메리Mary에서 유래했다는 Maryburgh 마을도 포트 윌리엄 인근에 있다. 


4.

포트 윌리엄의 첫인상은 한단어로 정갈함이다. 예쁜 길가에 예쁜 상점들이 사열하듯 가지런히 자리를 잡았다. 거리는 청소부가 방금 지나간 것처럼 깨끗하다. 상점은 대부분 단층이다. 그것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더 정겹다. 마치 영화 세트장 같다. <트루먼쇼> 세트장이 아마 이랬을 것이다. 여행의 매력은 이런 이질적인 공간과 낯선 감정을 자주 체험할수록 배가된다. 


코스타COSTA 간판이 반갑다. 영국을 대표하는 커피 프랜차이즈지만 스코틀랜드에서는 처음 본다. 창가에 붙은 포스터가 눈길을 끈다. 커피콩으로 다양한 얼굴을 형상화한 이미지 옆에 Show us what you’re made of! (뭘 만들 수 있는지 보여줘!)란 카피가 붙어 있다. 글과 그림으로 우리를 멈춰 세운 크리에이티브의 힘은 박수 받을 만하다. 오랜만에 커피 한잔을 손에 들고 거리를 나선다. 


이번에는 THE GRANTE HOUSE 간판이 우리를 멈춰 세운다. 간판 자체가 무슨 예술 작품 같다. 상점에서 파는 물건들을 심볼릭하게 꾸며 만들었다. 자세히 뜯어보니, 나무를 양각으로 깎아 만든 그야말로 마스터피스다. 나무 질감이 멋을 더한다. 그랜트 하우스는 보석과 시계, 옷과 티셔츠, 도자기와 운동 용품 심지어 악기도 판다. 이름처럼 그랜트하다. 그렇다고 규모가 큰 것은 아니다. 다른 상점과 비교하면 크다고 할 수 있지만, 저 공간에 저 많은 물건들이 어떻게 들어가는지는 당최 모르겠다. 


가장 인상적인 상품은 티셔츠다. 전혀 다른 컨셉으로 디자인된 티셔츠 수백장을 팔고 있다. 유머와 해학이 넘치는 티셔츠가 있는가 하면, 스코틀랜드 고유 정서를 담은 것도 있다. 허투루 만든 디자인이 하나도 없다. 주제가 무엇이건 개성을 제대로 끄집어낸 작품들이다. 티셔츠 하나하나에 인사이트가 있고, 아이디어가 있다. 이 정도면 판다는 것보다는 전시하고 있다는 표현이 더 어울린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다양하면서 유니크한 디자인이 담긴 티셔츠를 이렇게 많이 만들어낼 수는 없다. 제대로 구경하려면 한나절은 필요할 정도다. 아티스트 집단과 연계된 특별한 시스템 구축없이 이것은 불가능한 컨텐츠들이다. 이런 기획을 가능하게 만든 그랜트 하우스 사장님의 오지랖이 너무 궁금하다. 내 마음도 모르고, 아내와 아이들은 애저녁에 시큰둥한 눈치다. 


5.

다른 길 끝에도 작은 광장이 있다. 웨스트 하이랜드 박물관West Highland Museum이 우리를 유혹한다. 입장료를 내고 입장한다. 웬만해선 입장료 내는 일이 없는 우리 같은 여행자에게 그것은 대단한 관심을 반증한다. 작은 박물관은 하이랜드 서쪽 사람들의 삶과 관련한 수집품과 고고학적 가치가 있는 물품들을 주로 전시하고 있다. 찰리 왕자와 자코바이트 관련 자료들도 제법 있다.  


가장 흥미로운 전시는 코만도Commando에 관한 것이다. 영화 <코만도>(1985) 속 코만도가 허구가 아닌 실재했던 부대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코만도는 1940년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독일에 점령된 유럽을 기습할 특공 부대 창설을 요구하며 만들어졌다. 명목상으론 영국 육군이 창설한 세계 최초의 현대식 특수부대지만, 실제로는 영국 뿐 아니라 독일에 맞선 전 유럽인과 미국인도 다수 포함된 연합체 성격이 강했다. 


1942년 웨스트 하이랜드에 훈련소Depot가 설치되면서 코만도의 역사도 시작된다. 훈련소는 포트 윌리엄에서 차로 30분 거리에 있는 아크나캐리Achnacarry 지역이었다. 지금 그곳에는 제2차 세계대전에서 전몰한 코만도를 위령하는 코만도 기념탑Commando Memorial이 있다.  어린 시절 극장에서 본 아놀드 슈왈츠제너거가 자꾸 겹쳐 보인다. 


6.

실제 포트 윌리엄은 자연 환경으로 더 유명하다. 영국에서 가장 높은 벤네비스Ben Nevis 산과 글렌 나비스Glen Navis 계곡으로 가는 관문이면서 아름다운 린네Linnhe 호수를 끼고 있다. 하이킹이나 등반, 산악자전거 등을 즐기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여기를 방문한다. 포트 윌리엄을 일컬어 대영제국의 아웃도어 수도Outdoor Capital of the United Kingdom라고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더불어 포트 윌리엄은 스코틀랜드 5대 수출품 가운데 하나인 스카치 위스키도 유명하다.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먼저 증류주 제조를 허가 받은 벤네비스 양조장Ben Nevis Distillery이 여기서 가깝다. 19세기 위스키 양조장 투어19th-century whisky distillery tours 프로그램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스카치위스키 제조에 가장 중요한 것은 협곡을 타고 흘러내리는 맑고 깨끗한 물이다. 


이전 20화 20. 자코바이트 증기 기차는 달린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