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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Karl Oct 30. 2022

20. 자코바이트 증기 기차는 달린다

1.

배가 열린다. 1층은 차량들 자리다. 빨간 글씨로 쓰인 경고 문구(Max Headroom 5.1metre) 아래를 지난다. 4인승 승용차에 불과한 내 차를 괜스레 올려다본다. 여객선 3층 난간에서 스카이섬을 바라본다. 부지런히 달려오는 하늘색 폭스바겐 마이크로 버스를 마지막에 태우고 배는 출발 준비를 마친다. 내륙까지는 30분 정도가 걸린다. 


강 같은 바다 가운데서 작고 하얀 요트를 만난다. 배가 일으키는 물결에 크게 요동친다. 섬은 점점 흐릿해지고, 본토는 갈수록 말끔해진다. 똑같이 생긴 연립주택 백여 채가 해안가 라인을 따라 줄지어 있다. 항구 한 켠에는 제법 오랜 세월을 견딘 것같은 공장 하나가 쭈뼛거리며 바다로 튀어나와 있다. 스코틀랜드 본토 첫 마을, 말리그Mallaig다.


곧바로 글렌피난 역Glenfinnan Station을 설정한다. 해리포터 영화에 등장하는 고가교가 거기에 있다. A830 국도는 철길과 함께 바다를 끼고 달린다. 도로 상태는 불량하다. 하지만, 모든 것은 상대적인 법이다. 스카이섬에서 보낸 며칠 동안 아스팔트 도로는 거의 달리지 못했다. 지금 우리에게 낡은 국도는 카펫 융단이다. 말리그를 벗어나자마자 곧바로 대자연 속이다.


바위산을 쪼개어 길을 낸 곳이 유난히 많다. 험한 땅이란 증거다. 바다가 사라지고 호수가 나타난다. 에일트Eilt 호수 주변은 죄다 돌산들이다. 산 절반은 돌이고, 나머지 절반의 절반만 초록이다. 영국에서 이런 산은 드물다. 헤어진 철길을 다시 만난다. 언덕 하나를 넘어 좌회전한다. 딱 보기에도 쓸모가 없어진 오래된 빨간 공중전화 박스를 지나 재차 언덕을 오른다. 언덕 끝에 글렌피난 역이 보인다. 


2.

글렌피난 역은 글라스고Glasgow를 출발해서 포트 윌리엄을 지나 말리그를 연결하는 West Highland 노선의 중간역이다. 이미 포트 윌리엄까지는 1894년에 철도가 놓였었다. 이후 말리그를 주요 항구로 키우는 계획이 수립되면서 글렌피난 역이 중간에 생겨났다. 처음 개통되던 1901년에는 수많은 여객과 화물을 실어 날랐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역 기능이 현저히 떨어지며 폐쇄될 위기에 처한다. 


박물관을 세우고, 오래된 기차를 다이닝 식당과 숙박 시설로 개조하는 등 글렌피난 역은 나름의 혁신을 거듭하며 명맥을 유지했다. 운명을 바꾼 사건은 2002년에 일어났다. 가까운 고가교가 해리포터 2편, <해리포터와 비밀의 방>에 등장하면서 역은 하루 아침에 관광명소로 이름을 떨친다. 하늘을 나는 자동차를 타고 호그와트로 가는 장면에서 글렌피난 고가교Viaduct가 등장한다. 영화 한 컷이 그런 파장을 불러일으킬 줄은 아무도 몰랐었다. 


역사 앞 안내문은 고가교를 구경하는 몇 가지 옵션을 제안한다. 하나는 고가교를 순환하는 산책로다. 4킬로미터고, 1시간에서 2시간 정도 걸린다. 두번째 제안은 고가교를 보는 뷰포인트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코스다. 약 1시간이 필요하다. 세번째는 역이 지정한 전망대까지 갔다 오는 옵션으로 30분이면 충분하다. 우리는 두번째를 선택한다. 아머데일 선착장 예쁜 집에서 봤던 Woodland Walk 푯말이 여기에도 있다. 고유명사인줄 알았더니 일반명사였던 모양이다. 


질척이는 땅 위로 나무 고가를 만들었다. 고가 끝에서 작은 터널을 지난다. 사람이 다니는 길 옆에 물이 지나는 길을 따로 만들어 놓았다. 물소리가 터널 안을 울린다. 탁 트인 풍경이 터널 밖에 기다리고 있다. 피난Finnan 강 줄기가 계곡을 거쳐 멀리 쉬얼Shiel 호수로 모이는 모양이 한눈에 보인다. 언덕 너머에 고가교가 시작되는 지점이 얼핏 눈에 들어온다. 아이들은 고가교를 먼저 보겠다며 신나게 달려간다. 


좁은 산길을 구비구비 돌아 세번째 추천 장소에 이른다. 그런데 고가교가 절반 정도만 보인다. 온전한 모습을 보려면 더 나아가야 한다. 완만한 산길에 만들어 놓은 나무 계단을 따라 걸음을 옮긴다. 드디어 두번째 추천 장소인 고가교 뷰포인트다. 거의 반원에 가깝게 휘어진 고가교가 피난 계곡을 건너 등선과 등선을 연결한다. 저 멀리서 시작된 고가교가 발치 앞을 지나 숲 속으로 사라진다. 


3.

글렌피난 고가교는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긴 콘크리트 철교다. 380미터에 이른다. 교각은 21개 반원형 아치가 30미터 높이로 철로를 떠받치고 있다. 매스 콘크리트 방식으로 지어졌다. 철근 같은 금속 보강재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방식이다. 고가교를 내려다본다. 나와 아내와 준하와 준서가 기억하는 영화 속 장면이 조금씩 다르다. 기억을 재구성하며 한참을 떠든다. 막상 여기까지 왔더니 돌아가는 길이 아쉽다. 계획을 수정해서 더 나아가기로 결심한다. 


길은 고가교 아래로 우리를 데려간다. 30미터짜리 반원형 아치를 지탱하는 교각 규모가 상당하다. 교각 지름이 15미터나 된다.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고가교 건설 중에 말 한 마리가 교각에 떨어진다.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며 믿거나 말거나 하던 이야기는 2001년에 새롭게 조명받는다. 누군가 검증에 나선 것이다. 검증은 교각 전체를 스캐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리고 중앙에 있는 교각 하나에서 말 유해와 수레를 발견한다. 


가끔은 진실 혹은 거짓이 모호한 상태로 유지되는 것이 나을 때가 있다. 교각 안에 있을 수도 있는 말을 상상하는 것과 시멘트에 짓이겨진 말 사체를 생각하는 기분은 하늘과 땅 차이다.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인간 본성도 이해는 된다. 하지만 신화가 기술에 의해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것은 마냥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일만은 아니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고가교는 훨씬 거대하고 아름답다. 멀리서 달려오는 기차 소리가 교각을 울린다. 철로를 타고 전해진 울림이다. 기차가 고가교를 지나는 찰나를 잡기 위해 뒤로 멀리 물러나 자리를 잡는다. ScotRail 글자가 선명한 두 량짜리 기차가 열심히 달려온다. 증기기관이 뿜는 연기와 소리 덕분에 글렌피난 계곡 정취가 한껏 살아난다.


고가교 아래 길은 쉬엘 호수 쪽으로 곧게 뻗었다. 고가교를 바라보며 뒷걸음으로 걷는다. 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주변 자연과 어우러진 고가교 풍경이 신비롭게 바뀐다. 호수로 가는 길 옆에 글렌피난 방문자센터가 있다. 산길을 넘느라 소비한 열량을 음료와 비스켓으로 보충한다. 센터 뒤에는 고가교를 보는 또다른 뷰포인트가 있다. 고가교를 실컷 감상한 우리에겐 별 의미가 없다. 


4.

호숫가는 공원처럼 조성해 놓았다. 첨성대를 닮은 기념탑이 한가운데 덩그러니 서 있다. 탑 이름은 Glenfinnan Bliadhna phrionnsa다. 게일어다. 독해가 안된다. 기념탑은 첨성대보다 높고 곧으며 날씬하다. 18미터나 되는 탑 꼭대기에 킬트를 입은 하이랜더가 쉬얼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 안내글을 읽으며 작은 탄성을 터뜨린다. 스코틀랜드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의 출발점이 바로 여기란 사실을 알려주었기 때문이다. 


여기는 프랑스에서 스코틀랜드로 숨어든 찰스 왕자와 하이랜더 1500여명이 자코바이트 봉기를 결사(1745년)한 곳이다. 그로부터 1년 뒤, 쿨로덴 전투에 대패하며 봉기는 막을 내린다. 그리고 1815년, 하이랜더들은 여기에 기념탑을 세운다. 요컨대, 이곳 글렌피난은 자코바이트 봉기의 출발점이고 귀결점인 곳이다. 웨스트 하이랜드를 달리는 열차를 자코바이트 증기기차the Jacobite Steam Train라고 부르는 이유를 알겠다.


글렌피난 역으로 차를 가지러 간다. 아내와 아이들은 방문자센터에 남겼다. 산길을 제법 내려왔으니 오르막길을 제법 오르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땀방울이 이마에 맺힐 때쯤 호숫가 기슭에 숨은 예쁜 카톨릭 교회를 발견한다. 스코틀랜드에서 카톨릭이라며 대놓고 이름에 밝힌 교회는 처음 본다. 걸음을 더 크게 내딛는다. 빨간 공중전화 부스를 지난다. 거의 45도에 가까운 경사길을 올랐더니 다리에 쥐가 오를 지경이다. 


내가 40분 넘게 걸었던 길이 자동차로는 채 5분이다. 어느덧 해가 기운다. 짙은 구름을 겨우 빠져나온 햇빛이 능선 너머 뒷산에 거대한 그림자를 만들었다.  포트 윌리엄까지는 아직도 제법 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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