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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Karl Oct 30. 2022

22. 글렌코 계곡의 대학살

1.

웨스트 하이랜드 웨이West Highland Way에 차를 올린다. 포트 윌리엄을 벗어나 A82 해안가 도로를 달리다가 투박한 2차선 철제 다리로 레벤Leven 호수를 건넌다. 다리가 생기기 전에는 연객선Ferry이 다녔을 만큼 큰 호수다. 아름다운 호수와 울창한 산림을 감상하느라 하마터면 Welcome to Glencoe 이정표를 놓칠 뻔했다. 세 갈래 길에서 선택한 작은 길은 작은 농가 마을을 지난다. 모든 상점 상호가 어떤 글렌코 아니면 글렌코 무엇이다. 글렌코가 멀지 않았다. 


농가 마을 작은 길은 산길로 이어진다. 나무들이 빽빽하게 우거져 있다. 차 안 공기가 더없이 청량해진다. 차 한대가 겨우 빠져 나가는 좁은 산길을 한참 달린다. 금방 길이 끊겨도 이상할 것 전혀 없는 적막한 산길이다. 숲이 깊어질수록 불안감도 깊어진다. 레벤 호수로 가는 코Coe 강 지류와 산길이 만났다 헤어졌다를 반복한다. 길을 잘못 들었을지도 모른다는 물음표가 확신으로 굳어갈 즈음 큰 건물 하나가 나타난다. 


글렌코 유스호스텔로 뛰어들어간다. 다행히 청년 하나가 프론트를 지키고 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다. 우리가 있는 현재 위치와 목적지를 묻는다. 청년은 지도 한 장을 꺼내더니 펜으로 위치를 찍어 준다. 모든 것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청년의 확인은 나에게 구원이었다. 어깨를 다독이는 위로였다. 환하게 웃음짓고 주책스럽게 땡큐를 날린다. 초등학생도 오를 수 있는 등산로를 덤으로 알아내고 가족과 극적인 상봉을 한다.


2.

지나온 산길만큼 더 달린다. 어느 순간 숲길이 사라지고 시야가 뻥 뚫린다. 길 양쪽에 높은 봉우리 산들이 산맥을 이룬 장관이 펼쳐진다. 스카이섬 봉우리들이 하나하나 독립적이었다면, 글렌코 봉우리들은 거대하게 어깨 걸고 연대해 있다. 우리가 움직이면 대자연도 살아 움직인다. 이 놀라운 광경을 차 안에서만 보는 것은 염치가 없는 일이다. 차에서 내려 제자리를 빙글빙글 돈다. 글렌코의 질감을 파노라마로 느낀다. 


여기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자연 절경 1001>에 있는 ‘글렌코의 잃어버린 계곡’이 틀림없다. 빙하가 깎아 만든 넓은 협곡, 높이가 250미터에 이르는 가파른 봉우리들, 코 강으로 모여드는 바위 경사면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그런 풍경이 아니다. 아찔한 풍경을 담느라 셔터 누르는 것을 멈출 수가 없다. 순간 앵글 속에 백마가 우리를 향해 달려오고 있다. 백마 탄 중년 아주머니가 가벼운 눈인사를 건네고 지나간다. 


백마와 중년 아주머니, 이 상황은 그 조합만큼 어리둥절하다. 비현실적인 대자연 속에서 연출된 비현실적인 상황에 적막이 흐른다. 적막은 아줌마가 목이 엄청 늘어난 티셔츠를 입었다는 준서 한마디에 걷힌다. 한바탕 웃음이 터진다. 중년 부인은 가죽 부츠와 승마 바지, 헬멧은 완벽히 갖췄다. 하늘색 스프라이트 무늬가 그려진 헐거운 반팔 티셔츠가 문제였다. 


3.

산길은 다시 A82 도로와 만난다. 왕복 1차선 도로가 반갑다. 도로 옆에 푸른 물빛의 Achtriochtan 호수가 더해져 글렌코는 훨씬 드라마틱 해진다. 경이롭다는 말 말고는 할 말이 없다. 아찔한 흥분 상태가 길어지면서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다. 드디어 유스호스텔 청년이 추천한 장소에 도착한다. 오늘 같은 평일도 관광버스 한두대는 멈춰서 건너편 산을 카메라로 담는 사람들이 있을 거라는 청년의 말은 사실이었다. 과연 관광버스 서너 대와 승용차 예닐곱 대가 우리보다 먼저 주차장을 차지하고 있다. 


주차장 건너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는 청년이 말한 세자매봉The Three Sister이다. 협곡 중턱 주차장 아래는 황무지와 깊은 계곡이다. 황무지 끝에서 가파르고 울퉁불퉁한 바위 산이 거칠고 장대하게 솟아 있다. 이질적이고 생경한 산 풍경이다. 계곡에서 시작한 길이 봉우리를 향해 가늘게 이어지는 것이 보인다. 산으로 들어갈 채비를 마치고 계곡을 향해 내려간다.


나무로 만든 제법 운치 있는 다리를 건너, 세자매봉을 오르는 산길에 이른다. 돌투성이 산은 키 작은 풀들 말고 다른 생명은 허용하지 않는다. 바위를 딛고 산을 오른다. 유스호스텔 청년이 자꾸 생각난다. 초등학생이 갈 만한 등산 코스라는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든지, 청년의 기준이 너무 높았든지 산은 험하기만 하다. 바닥만 쳐다보고 묵묵히 오를 뿐이다. 


사람 목소리가 들린다. 우리처럼 네 가족이 앞서 오르고 있다. 젊은 부부와 어린 두 자녀다. 작은 배낭을 맨 3살 남짓한 아이가 첫째다. 둘째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지 아빠 배낭에 들어가 있다. 예전에 뉴캐슬 과학관에서 머리도 못 가누던 아이보다는 크다. 배낭 속 아이가 우리를 빼꼼 쳐다본다. 그 모습에 각성한 아내와 아이들이 걸음을 재촉한다. 이번엔 건장한 청년이 커다란 개와 함께 산을 내려오고 있다. 집 근처를 산보하는 가벼운 옷차림이다. 두 딸과 함께 온 노부부도 따라잡는다. 


종아리에 힘이 오르고, 얼굴에는 땀이 범벅이다. 산을 오른지 한시간은 훌쩍 넘었다. 점심을 먹을 적당한 시간이다. 시야가 확 트인 작은 바위 위에 자리를 잡는다. 우리는 차를 주차한 높이만큼 산을 올라왔다. 멀리 점처럼 우리 차가 보인다. 점심은 오이와 햄, 치즈를 곁들인 크로와상 샌드위치다. 마침 산허리를 감싸는 바람이 상쾌하게 분다. 


4.

다시 산을 오른다. 다시 30분쯤 지났을까? 산세가 달라진다. 능선을 돌던 산길이 골짜기 쪽으로 방향을 튼다. 세자매봉을 오르는 길이 깍아지른 듯 가파라진다. 눈인지 얼음인지 분간할 수 없는 것이 세자매봉 꼭대기 주위를 하얗게 덮고 있는 모습도 보인다. 산의 인상이 바뀐다. 날카롭고 서늘한 기운이 돋는다. 잠시 잊고 있던 ‘글렌코 대학살’ 이야기가 떠오른다. 


이야기는 명예혁명(1689년)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명예혁명은 카톨릭에 기반한 제임스2세를 퇴위시키고, 프로테스탄트 기반의 윌리엄3세가 왕위에 오른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스코틀랜드는 정치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에 놓이게 된다. 스코틀랜드 스튜어드 왕조 출신이던 제임스2세 퇴위는 스코틀랜드에 큰 충격이었다. 불만이 봇물처럼 터져 나온 것은 당연했다. 이에 윌리엄3세는 스코틀랜드 모든 부족에게 충성 서약을 요구한다. 


왕은 1692년 1월 1일까지 맹세를 거부하면 토지와 가옥을 몰수하고 부족 우두머리를 처형하겠다고 경고했다. 글렌코에 근거지를 둔 맥도날드 가문은 조금 늦은 1월 6일에 충성을 서약한다. 스코틀랜드 겨울은 종종 불가항력적인 상황을 만든다. 새해 첫날까지 충성 서약을 마치라는 명령서가 혹한과 거친 지형 때문에 늦게 전달된 것이 문제였다. 알라스테어 맥클레인Alasdair Maclain 부족장은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서약을 마친 후, 글렌코로 돌아간다. 


그러나 윌리엄3세는 생각이 달랐다. 맥도날드 가문을 영국 왕의 권위를 강화하는 본보기로 삼길 원했다. 맥도날드 가문과 오랜 숙적 관계였던 캠벨Campbell 부족을 주축으로 군대를 꾸린다. 2월 2일 세금을 징수한다는 명목으로 신분을 속인 군대가 맥도날드 부족을 방문한다. 맥도날드 가문은 열흘 동안 이들을 환대하는 잔치를 벌인다. 하이랜드는 손님을 융숭히 대접하는 것이 오랜 풍습이었다. 


2월 12일 캠벨 가문 부족장 로버트 캠벨에게 살상명령서가 전달된다. 70세 미만은 모두 죽이라는 내용이었다. 다음 날 새벽 5시, 군대는 맥도날드 가문을 학살한다. 성인 남성 38명을 살해하고 가옥을 불태운다. 부녀자와 아이들 40여명은 혹한 속에 저체온증으로 사망한다. 학살자를 친구로 받아들인 맥도날드 가문은 전체 부족 가운데 20%에 해당하는 부족민을 하룻밤 새 잃고 만다. 역사는 그날을 ‘글렌코 대학살’로 기록하고 있다. 


5.

글렌코 대학살은 스코틀랜드의 반잉글랜드 정서를 들끓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50여년 후 발발한 자코바이트 봉기도 그 에너지의 원천은 글렌코 대학살에서 응축된 것인지도 모른다. 캠벨 가문에 대한 앙금도 아직 남아 있다. 글렌코 주변에는 No Hawkers or Campbells라고 쓴 푯말을 붙인 술집들이 제법 많다. 행상과 캠벨 부족 사람들은 출입을 금지한다는 내용이다. 세월이 흘러도 비겁한 집단에 대한 응징은 계속되고 있다.


<왕좌의 게임>에는 글렌코 대학살에 영감 받아 만들었다는 에피소드가 있다. 스타크 가문 사람들이 결혼식 피로연에서 몰살당하는 장면이다. 시즌3 에서 제9화 <The Rains of Castamere>, 우리에게는 ‘피의 결혼식’이란 타이틀로 더 유명하다. 역사라는 것이 이렇게 무서운 것이다. 기억하고 있으면 언제든 어떻게든 되살아나기 때문이다.  


골짜기로 들어가는 산길에서 물소리를 듣는다. 협곡 능선을 흐르던 작은 물줄기가 작은 포물선을 그리며 낙하하고 있다. 나는 머리를 들이민다. 준서도 따라한다. 아내와 준하는 땀을 훔쳐 낸다. 클라이밍 장비를 제대로 갖춘 두 청년이 산을 내려온다. 이제는 오르는 것을 멈출 타이밍이란 것을 직감한다. 카메라 앵글로 담을 수 없는 글렌코 계곡 풍경을 감각 곳곳에 가능한 담으며 천천히 산을 내려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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