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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Karl Oct 30. 2022

23. 전율을 부르는 물의 세계

1.

협곡을 구비구비 돈다. 눈은 동그래지고 입은 ‘우와’를 연발한다. 글렌코를 ‘웨스트 하이랜드의 꽃’이라 부르는 수사는 글렌코를 정의하는 말로는 한참 부족하다. 내 생각에 ‘신의 땅’이 조금 더 낫다. 신들이 쓱싹쓱싹 빚어 만든 봉우리와 골짜기가 사방에 널렸다. 마치 글렌코 협곡은 신들의 놀이터 같다. 세자매봉에서부터 이어진 산자락 저 끝에 글렌코 리조트Glencoe Mountain Resort가 보인다. 아마도 신의 땅은 잃어버린 계곡에서 여기까지인 모양이다. 


리조트를 지나서는 협곡이 사라지고 완만한 구릉이 나타난다. 길도 곧게 뻗어 있다. 스코틀랜드 고원 지대에서 만나는 한가로운 풍경도 그리 나쁘진 않다. 그런데 십여 분쯤 달렸을까? 또 한번 숨이 가빠온다. 크고 작은 물웅덩이들이 지평선 끝까지 펼쳐져 있다. 또 한번 급하게 차를 세운다. 저 풍경 앞에 어쩔 도리가 없다. 마침 뷰포인트다.


안내문을 찾는다. 궁금하면 얼른 읽어야 한다. 여기 일대는 란노치 무어Rannoch Moor로 불린다. 바로 앞 호수는 바 호수Loch Ba다. 이런 호수가 수백개다. 봉긋한 언덕이 있는 곳을 찾아 들어간다. 란노치 무어 풍경을 제대로 보고 싶은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땅이 질척이고 신발이 젖는 것쯤은 전혀 상관없다. 


또 다른 세상을 본다. 작은 호수 수백개가 정말로 지평선에 닿아 있다. 비교하자면 스카이섬 에코뮤지엄 12번이다. 수평선 끝까지 수많은 섬들이 겹친 모양과 닮았다. 바다가 땅이고 섬이 호수라고 생각하면 된다. 호수에 비친 새파란 하늘로 새하얀 구름이 떠다닌다. 하늘이 땅에 폭 하고 담겼다. 협곡이 우람하고 장대한 이미지라면, 무어는 부드럽고 몽환적이다. 해발 300미터 고원지대가 물에 잠긴 모습은 쉽게 상상할 수 있는 풍경이 아니다. 게다가 이곳 란노치 무어 면적은 글라스고만큼 넓다. 


이런 풍경을 이해하려면 12,0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빙하시대가 끝나가던 스코틀랜드 서부는 내륙의 많은 부분이 얼음으로 덮여 있었다. 그 중에서도 이 지역은 400미터가 넘는 거대한 두께로 얼음이 덮여 있었다. 어느 날 기온이 높아지고 얼음이 녹기 시작한다. 그때 미쳐 빠져나갈 곳을 찾지 못한 얼음물이 호수를 이루고 늪지를 형성하며 여기 머물게 된 것이다. 다시 봐도 전율을 부르는 저 물의 세계는 저세상 풍경이다. 


2.

글라스고까지는 아직도 갈 길이 멀다. 툴라Tulla 호수를 지나면서 잔디밭 같던 구릉에 큰 나무들이 나타난다. 하마터면 타인드럼Tyndrum 마을 교차로에서 엉뚱한 도로에 차를 올릴 뻔했다. A82를 놓치고, A85 국도를 탔다면, 아일랜드 해를 구경할 뻔했다. 마을을 지나자 풍경이 완전히 바뀐다. 신의 땅에서 인간의 땅으로 완전히 돌아왔다. 


로몬드Lomond 호수가 나타난다. 표면 면적으로는 영국에서 가장 큰 호수다. 호수가 시작되는 곳에 인버루글라스Inveruglas 방문자 센터가 보인다. 잠깐 휴식이 필요한 타이밍이다. 출출함을 달래기에도 최적이다. 파니니와 샌드위치, 스콘 같은 간단한 음식을 주문하고 호숫가에 앉는다. 하얀 센터 건물이 호숫가 정취와 잘 어울린다. 선착장도 낭만적이다.  


이런 정취에 반하는 커다란 인공구조물이 길 건너 산에서 존재감을 뿜고 있다. 슬로이 발전소Sloy Power Station다. 산 중 담수호인 슬로이 호수에서 무려 3킬로미터나 터널로 물을 끌어와 로몬드 호수에 낙하시키는 수력발전소다. 물이 떨어지는 거대한 송수관 4개가 산 경사면과 열을 맞춘 모습이 이채롭다. 발전소는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에 건설을 시작해서 1949년에 완공했다. 5년간 노동자 2,200여명이 투입되었다. 거기에는 독일군 포로들도 다수 있었다고 한다. 


지도에서 현재 위치를 살핀다. 로몬드 호수 최북단에서 글라스고는 아직 멀다. 호수 최남단에 있는 작은 마을, 발로치Balloch를 구경하기로 결정한다. 출발 전에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들고 선착장 옆 예쁜 산책길을 걷으며, 로몬드 호수를 즐긴다. 그런데 자꾸만 글렌코가 떠오른다. 협곡과 계곡과 산길, 그 잔상이 사라지질 않는다. 괜히 로몬드 호수에 미안하다. 


3.

A82국도가 호수에 바짝 붙었다. 길이 36.4킬로미터, 최대 폭 8킬로미터나 되는 로몬드 호수를 오롯이 보여줄 모양이다. 인버루글라스에서 발로치로 가는 길은 Three Lochs Way(세 호수 길)다. 길은 로몬드와 가레Gare, 롱Long 호수를 요리조리 피해서 만들어졌다. 가레와 롱 호숫가를 지나는 다른 버전의 세 호수 길도 있다. 엄청 큰 라운드어바웃을 돈다. 거대한 구조물이 중앙을 장식하고 있다. 스코틀랜드 최초의 국립공원, Loch Lomond & Trossachs 국립공원을 상징하는 구조물이다. 


발로치를 가리키는 이정표가 A811 국도로 우리를 안내한다.  선착장 근처에 차를 세운다. 근사한 잔디밭에 놀이터가 몇 개나 있다. 배트와 글러브를 꺼내서 아이들과 펑고 놀이를 한다. 동네 아이들이 관심을 보인다. 공을 치고 캐치볼하는 모습을 신기하게 쳐다본다. 스코틀랜드에서 야구는 생소한 스포츠이긴 하다. 근처 놀이터에서 한번 더 에너지를 쏟고 나서야 순해진 아이들과 마을 구경에 나선다. 


발로치는 로몬드 호수로 흘러 들어가는 레븐Leven 강을 따라 형성된 마을이다. 강에 요트가 한가득이다. 강이 비좁을 만큼 너무 많은 요트가 정박해 있다. 주거 목적인 요트도 적지 않다. 요트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파리 센강에서도 본 적 있다. 우리나라도 허용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강에서 자고 일어나 출근한다. 얼마나 근사한가! 발로치 다리 아래를 지나 선착장에 이른다. 호수를 관광하는 크루즈들이 차례를 기다리며 졸고 있다. 한가로운 발로치에서의 늦은 오후다. 


4.

아침부터 우리와 함께한 A82국도와 작별한다. 다음은 A898 차례다. 클라이드Clyde 강이 모습을 드러낸다. 강 건너가 글라스고다. 어스킨 다리 너머에 그 유명한 발렌타인 공장이 보인다. 하이랜드가 끝나고 문명으로 들어서고 있다는 걸 실감한다. 길가에 늘어선 남다른 가로등도 그 상징이다. 2~30미터가 넘는 길쭉한 기둥 꼭대기에 LED등 8개가 반짝인다. 꽃잎을 닮았다. 


글라스고 시내를 달린다. 옛 것과 새 것이 특별한 구분없이 뒤섞여 있다. 현대적이면서 고전적인 인상을 받는다. 곧이어 가로등마다 걸린 현수막 글귀가 나에게 날아와 꽂힌다. People Make Glasgow. 시민이 도시를 만든다는 관점은 국민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말처럼 뻔해 보이지만, 왠지 모르게 힘이 느껴지는 슬로건이다. 시내 중심으로 갈수록 다양한 형태로 더 많은 슬로건이 도시를 점령하고 있다. 


글라스고 프리미어 인에 짐만 던져 놓고 거리로 나선다. 문명으로 돌아온 것을 자축하기 위해 레스토랑을 예약해 놓았다. 거리는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다. 밤공기를 가르며 고색창연한 빌딩 사이를 걷는 기분이 상쾌하다. 밤거리를 배회하는 것도 오랜만이다. 하이랜드의 밤은 인공적인 모든 것이 칠흑 같은 어둠에 사라진 공간이었다. 적갈색 빌딩 사이로 한 블록을 걸었더니, 소박한 네온싸인 불빛이 거리를 깨우는 블록이 나타난다. 


빅토리아 시대에 지은 빌딩들 1층이 모두 상점들이다. 하나같이 독특한 간판을 가졌다. 유머와 위트가 담긴 디자인이다. 주된 재료는 폰트다. 간판마다 저마다의 개성을 담은 희한하고 각별한 폰트들이 빛난다. 덕분에 저녁을 예약한 Steak&Cherry도 손쉽게 찾는다. 지루한 고딕체 은행 간판 옆에 맘껏 끼를 부린 돋보이는 간판이다. 뉴욕스타일 스테이크 하우스에서 풀코스로 문명을 즐긴다. 글라스고의 밤이 깊어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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