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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Karl Oct 30. 2022

25. 켈빈그로브와 매킨토시 콜렉션

1.

다시 조지 광장을 다시 지난다. 아침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광장에 있다. 길가에 퀘이커 교도가 모이는 미팅하우스(Quaker Meeting House)도 보인다. 철을 비틀고 꼬아 만든 독특한 폰트에 시선이 멈춘다. 아무리 생각해도 글라스고에 활력을 불어넣는 비타민 같은 중요한 요소가 폰트 같다. 스테이크앤체리 앞을 지나 한참을 더 달린다. 오른쪽에 엄청 많은 테니스장과 게이트볼 경기장이 보이더니 그 맞은 편에 켈빈그로브 미술관Kelvingrove art gallery and museum이 나타난다. 


켈빈그로브 미술관 1901년에 문을 열었다. 글라스고 건축물에 많이 쓰인 붉은 사암Locharbriggs Red Sandstone이 주로 쓰였다. 청동 조각물로 치장한 입구를 통과해서 계단을 오른다. 스페인 바로크 스타일로 장식된 럭셔리한 실내 공간에 눈이 번쩍 뜨인다. 2층에서 또 한번 솟아오른 천장은 규모감을 극대화시키는 효과를 준다. 게다가 마감은 통유리다. 8월 햇살이 실내로 쏟아진다. 


유리 천장에 대롱대롱 매달린 빡빡머리 두상 수백개에도 햇살이 떨어진다. 스코틀랜드 작가, 소피 케이브Sophie Cave의 ‘플로팅 헤드The Floating Heads’라는 작품이다. 두상은 모두 다른 표정을 갖고 있다. 웃고, 화내고, 찡그리고, 번뇌하고, 연민하고, 놀라는 얼굴들이다. 안내글은 섬뜩하다는 표현을 썼지만, 나는 익살스럽기만 하다. 켈빈그로브 미술관에는 22개 갤러리가 있다. 고대 이집트 유물에서 글라스고 예술학교 출신 작가들의 작품까지 시대를 망라한다. 전시되는 컬렉션도 공예품에서 박제품, 보석류, 자연사 등 다양하다. 


돼지와 양, 곰 등이 박제된 공간을 지나 글라스고를 주제로 삼은 작품들이 전시된 곳에 들어선다. 묘한 철제 작품 앞에서 걸음을 멈춘다. ‘Nocturnal Landscape’라는 1980년 작품이다. 새와 나무, 구름 같은 친근한 것들을 독특한 형상으로 비틀어 놓았다. 마치 추상 회화처럼 작품과 작품명 사이에 어떤 연관성도 못 찾겠다. 그런데 마음은 끌린다. 루브르나 오르세, 대영미술관 같은 곳에는 없는 다른 재미가 있다. 


2.

루브르의 ‘모나리자’처럼, 켈빈그로브에도 사람들을 불러모으는 작품이 있다. 살바도르 달리의 <십자가에 달린 성 요한의 그리스도>라는 작품이다. 가로 1.2미터, 세로 2.1미터로 대작은 아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금방 알겠다. 구도 때문이다. 십자가에 매달려 축 늘어진 그리스도 모습을 머리 위에서 내려다보고 구도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린 수많은 그림을 봤지만, 이런 구도는 처음이다.


달리는 이 작품을 위해 헐리우드 영화감독을 찾아갔다. 스턴트맨을 예수처럼 공중에 매달아 놓고 다양한 각도에서 사진을 찍고, 그 중 탑뷰 사진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러나 당대 평론가들은 이 작품에 냉담했다. 달리가 초현실주의 화풍을 버렸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바보 같은 생각이다. <십자가에 달린 성 요한의 그리스도>는 발상 자체가 초현실주의적이다. 대담한 구도가 만든 낯선 비주얼이 당대 사람들에겐 그냥 이상했던 것이다. 


달리 작품을 남달리 여긴 사람은 있었다. 글라스고 미술관 관장, 톰 허니맨이다. 달리를 찾아가 매매계약서에 서명한다. 저작권을 포함한 작품 가격으로 8,200파운드를 지불한다. 당시로는 대단한 금액이었던 모양이다. 글라스고 신문들은 일제히 미친 짓!(Absolutely mad!)이라고 대서특필했다. 하지만 결국 허니맨이 옳았다. 지금 이 작품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인기있는 그림으로 통한다. 


3.

이스트홀East Hall을 빠져나간다. 플로팅 헤드들이 조명을 쬐고 있다. 파랑, 빨강, 초록 빛깔 조명이 여러 방향에서 불규칙하게 날아온다. 센터 홀Center Hall 중앙에는 원탁의 인포메이션 센터가 있다. 그 위로 화려한 샹들리에가 번쩍인다. 이어 시선이 멎은 곳은 2층 정면에 있는 웅장한 파이프 오르간이다. 세월의 흔적이 가득한 유럽의 숱한 그것들과 달리 켈빈그로브의 그것은 반짝인다. 당연히 근래에 만들었다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다. 켈빈그로브의 파이프 오르간은 글라스고 국제박람회(1888년) 용으로 만든 것을 나중에 매입한 것이다. 100년이 훌쩍 넘은 골동품이다. 


마침 백발의 신사가 오르간 앞에 앉는다. 묵직하고 웅장한 소리가 홀을 가득 채운다. 조그만 소니 LED TV가 노신사의 연주를 생중계한다. 가녀린 발목이 날렵하게 움직이며 수십 개 페달 위를 유영한다. 삼단으로 쌓인 건반을 바쁘게 넘나드는 가는 손가락도 보인다. 소리도 즐겁고 눈도 즐거운 매력적인 신세계를 경험한다. 아이들은 이미 바닥에 앉아 턱을 괴고 삼매경에 빠졌다. 


4.

노신사가 떠나고 박수 갈채가 잦아들 즈음, 매킨토시 특별 콜렉션을 구경한다. 콜렉션은 매킨토시 아내, 마가렛Margaret Macdonald Machintosh 작품으로 시작된다. 거대한 금속 판넬 작품이 입구에 들어선 우리를 맞는다. 공간은 가구와 인테리어 작품들로 가득하다. 특별히 일반적인 것은 모두 없애고, 독특한 것들만 모아 놓은 것 같다. 


매킨토시는 아내에 대해 이런 말을 남겼다. ‘아내는 천재다, 나는 단지 재능이 있을 뿐이다(Margaret has genius, I have only talent)’. 대단한 찬사다. 내 생각에, 아내에 대한 이런 평가는 단지 예술적인 업적 뿐 아니라 인간 마가렛에 대한 평가다. 그녀는 매킨토시의 우울증과 알콜릭 그리고 경제적 어려움까지 감당한 슈퍼우먼이었다. 마가렛 없는 매킨토시는 존재할 수 없었다. 


매킨토시 작품은 색다른 형식으로 전시되고 있다. 그가 작업한 공간을 먼저 만들고 그 안에 작품을 그대로 배치하는 방식이다. 그의 작품은 공간이 갖는 특수성과 밀접한 관계성을 맺는다는 점에서 어쩌면 당연하다. 첫번째 공간은 그의 집이다. 처음으로 부부가 협업해서 만든 공간이다. 그 외 티 룸과 오크Oak 룸, 차이니스 룸 등으로 전시는 구획을 짓고 있다. 


5.

매킨토시는 자연 재료가 갖는 본성을 강조하는 심플하고 모던한 스타일을 추구했다. 당시 가구는 부를 과시하는 장식품으로 간주되었다. 복잡하고 화려하고 거대한 스케일을 강조한 가구들이 각광받았다. 따라서 작품 가치는 작업량과 소요된 시간에 비례해서 매겨졌다. 정교하고 인위적 요소가 많을 수록 좋은 작품으로 평가받던 시절이었다. 반면 매킨토시는 실용성을 강조했다. 겉치레보다 공간과의 조화에 초점을 맞췄다. 이는 당시 유럽 전역에 출현한 소위 모더니즘Modernist Ideas과 관련이 깊다. 


모더니스트 운동의 핵심 컨셉은 혁신적인 아이디어innovative ideas와 새로운 기술new technology의 발전이었다. 디자인에 대한 생각이 역사와 전통보다 현재와 미래에 대한 관심으로 방향을 급선회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 최전선에 매킨토시가 있었다. 하지만 매킨토시의 특이점은 스스로 모더니즘 선구자를 자처하면서도 천편일률적인 모더니즘 공리주의 성향과는 확실하게 선을 그었다는 점이다. 


그의 관심은 대중이 아니었다. 모두를 만족시키는 디자인이 아니라 독특한 개인 취향을 충족시키는 디자인에 천착했다. 덕분에 매킨토시 작품은 지금 감각으로도 모던하고 세련된 이미지를 가졌다. 그는 100년 앞선 트렌드로 당시를 살았던 사람이다.  


6.

매킨토시에 이어 고흐, 마티스, 르느와르, 세잔, 피카소를 만난다. 오르세 미술관이 떠오른다. 스코틀랜드 정체성을 담은 작품들이 전시된 공간도 들른다. 역사 속 장면과 자연 풍광을 담은 그림들이 사진처럼 걸려 있다. 글렌코 관련 작품에서 꿈같던 어제를 소환한다. 점점 켈빈그로브 매력에 흠뻑 빠진다. 매킨토시만 잠깐 보려던 나를 반성하게 만든다. 만약 글라스고 여행에서 나에게 주어진 시간이 한나절 뿐이라면, 나는 주저없이 켈빈그로브를 선택하겠다. 


켈빈그로브를 나선다. 주차장이 있어야할 자리에 도로가 있다. 입구는 들어갈 때 봤던 것과 똑같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입구 위에 있던 청동 동상이 없다. 케빈그로브는 앞만 있고 뒤가 없다는 브로셔에서 본 아리송한 구절이 기억난다. 공사를 마친 건축가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탑에서 몸을 던졌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이야기가 사실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근심이나 걱정이란 것은 시간이 흐르면 먼지처럼 가벼워지게 마련이다. 상황을 너무 진지하게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보면 참 안타깝다. 


마지막 일정은 글라스고 과학센터Glasgow Science Centre다. 켈빈그로브에 너무 오래 머물렀다. 과학센터 폐장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래도 아이들 기대를 저버릴 순 없다. 배꼽 시계도 난리가 났다. 두가지 욕망을 충족시킬 방법을 찾는다. 아내와 아이들은 과학센터로, 나는 저녁을 장만하기로 한다. 빅맥 세트를 테이크아웃해서 과학센터에 도착하자 구경을 마친 가족들이 마침 나온다. 영국 웬만한 도시에는 반드시 과학센터가 있다. 매번 들르는데도 아이들은 언제나 만족한다. ‘머리가 아닌 몸으로 배우는 과학’이란 슬로건이 항상 마음에 드는 것처럼 말이다. 


127미터 글라스고 타워가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는 수변에 저녁을 세팅한다. 근사한 클라이드 강 경관이 멋진 분위기를 선사한다. 평온하고 로맨틱한 저녁이다. 길 건너 스코틀랜드 BBC 건물 불빛이 점점 밝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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