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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Karl Oct 30. 2022

27. 공중에 매달린 현관문을 흘기다

1.

여전히 부카난 거리는 북적인다. 버스킹하는 청년을 잠시 구경하다가 몇 걸음 옮기지 못하고 다시 걸음을 멈춘다. 엄청난 존재감을 뿜은 건물이 느닷없이 나타난 까닭이다. 거대한 철제 장식물이 3층 건물 전체를 휘감고 있다. 글라스고 예술학교 철제 장식은 포인트 역할이었지, 이처럼 건물을 압도하지는 않았었다. 덩굴식물을 모티브로 한 유연한 철제 장식은 매킨토시와 닮았지만, 지나치다. 매킨토시에 영향받은 누군가의 작품이 분명하다. 


세상 모든 아류는 원조보다 과장되기 마련이다. 아마도 20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적 분위기와 시대적 요구를 반영한 아르누보Art Nouveau 진영 건축물일 가능성이 높다. 어쨌든, 압도적인 존재감만큼은 뇌리에 남을 만큼 강렬하다. 내가 몰랐던 부카난 거리 명물로 손색이 없다. 바쁘게 걸어서 작은 골목들을 훑으며 다시 조지 광장으로 간다. 


2.

광장은 행사장으로 변해 있다. 하얀 셔츠에 검정 조끼, 초록색 킬트Kilt를 입은 백여명이 백파이프를 연주한다. 사실 연주보다는 퍼레이드에 가깝다. 앞으로 갔다가 뒤로 갔다가 분열했다가 다시 모여 대형을 갖춘다. 검정색 베레모 덕분인지 대열은 한층 일사분란해 보인다. 객석에 자리를 잡는다. 처음보는 공연을 그냥 지나칠 순 없다. 


월드 파이프밴드 챔피온십World Pipe Band Championships이라 쓴 커다란 현수막이 공연의 정체성을 알려준다. 가장 권위있는 백파이프 경연이라고 한다. 스코틀랜드에서 백파이프 대회는 단순한 경연이 아니다. 글렌의 자존심이 걸린 일대 결전이다. 글렌을 상징하는 킬트를 입고 글렌을 대표해서 나선 참가자들 얼굴에는 결기가 서렸다. 나이와 성별을 초월한 남녀노소가 공통 목표를 위해 눈빛을 반짝이는 모습은 인상적이라는 소회를 넘어 감동적이기까지 하다.   


조지 광장은 빅토리아 시대 건축물에 쌓여 있다. 백파이프 밴드가 연주하는 날카롭고 웅장한 낯선 소리가 겹치며 여기는 딴 세상처럼 변한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강력한 어떤 힘이 느껴진다. 몇 팀의 공연이 끝나고 다른 밴드가 대열을 정비한다. 오늘은 우리도 정비가 필요한 날이란 걸 그제서야 깨닫는다. 오늘은 둔바Dunbar까지 가야하고 숙소도 캠핑장이다. 


3.

매킨토시를 찾아 다시 글라스고를 헤집는다. 올라갔다가 내려갔다가 유턴했다가 이렇게 톰톰 지시만 따르면 마직막은 언제나 목적지에 도착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해괴한 광경 앞에 우리를 데려다 놓았다. 현관문이 대략 지상5미터 공중에 매달려 있다. 몇 번을 물어도 톰톰은 분명히 여기가 매킨토시 하우스라고 확신한다.  


매킨토시 부부는 1906년부터 1914년까지 글라스고 대학 근처 계단식 주택에 살았다. 그런데 1981년, 대학이 부지를 확장하면서 매킨토시가 살던 옛집이 유실될 위기에 처한다. 대학은 부지에서 약 100미터 떨어진 곳에 집을 옮겨 다시 짓는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지금 5미터 공중에 현관문이 걸린 이상한 집이 생겨난 것이다. 괜히 그의 괴팍한 성격을 탓할 뻔했다. 


현재 매킨토시 하우스는 2012년에 개장한 훈터리언 미술관Hunterian Art Gallery에 귀속해 있다. 또한 미술관은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오래된 글라스고 대학 박물관 부속이다. 박물관을 세운 윌리엄 훈터William Hunter(18세기 해부학자이자 수집가)를 기리며 미술관 이름이 정해졌다. 모던하고 소박한 외관과 달리 미술관은 다양한 컬렉션을 보유하고 있다. 오늘은 던컨 생크Duncan Shanks 특별전이 열리고 있다. 


그는 20세기 가장 위대한 스코틀랜드 풍경 화가로 꼽힌다. 글라스고 인근 자연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 특별전은 작품 자체보다 한편의 인물 다큐를 보는 것처럼 꾸며져 있다. 던컨의 작업 방법과 접근법 등을 심층 분석해 놓았다. 작가가 45년 넘게 기록한 100권이 넘는 스케치북은 놀라움을 넘어 경이롭다. 글쓰기와 마찬가지로 그림도 엉덩이로 하는 일이란 생각이 든다. 사물과 풍경을 묘사하며 자기 스타일을 찾아가는 작업이 얼마나 지난하고 험난한 일인지 생생하게 전달된다. 재미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난 일이 누군가의 일기나 노트를 훔쳐보는 것 아니겠는가?


화랑을 지나면 매킨토시 하우스다. 팜플렛은 침실과 거실, 식당 같은 공간은 물론 문고리와 손잡이 같은 작은 소품까지 그대로 가져와 꼼꼼히 다시 조립했다고 자랑한다. 매킨토시는 아이코닉한 물건을 만드는 놀라운 능력을 지녔었다. 가구와 조명, 수공예품과 그림도 독특하게 이미지화했다. 그런 그가 가장 내밀한 자기 공간은 어떻게 꾸며 놓았는지 너무 궁금하다. 


콩닥거리는 가슴을 누르고 매킨토시 하우스로 향한다. 그런데 하우스가 가까워질수록 불길한 예감이 올라온다. 문 앞에 걸린 하얀 푯말 때문이다. 불길한 예감은 항상 적중한다. 일시적인 폐쇄Temporary Closure를 알리는 푯말이다. 폐쇄된 날짜를 확인하니 더 얄밉다. 8월 10일, 불과 5일 전이다. 힘없이 터벅터벅 갤러리를 나선다. 그리고 하릴없이 공중에 매달린 현관문을 흘긴다. 


2박3일 글라스고 일정을 끝낸다. 아직 못 본 매킨토시 흔적이 너무 많다. 그 중에 퀸즈 크로스 교회The Queen’s Cross Church가 아쉽다. 글라스고 태생 작가가 만든 유일한 교회로 매킨토시 소사이어티 본부가 거기 있다. 글라스고는 매킨토시의 도시가 분명하다. 어떤 측면에선 매킨토시가 가우디보다 위대하다. 가우디 디자인은 이미 한 시대를 넘어선 반면, 매킨토시 디자인은 아직도 글라스고에서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다. 


4.

고속도로에 차를 올린다. 던바로 가기 전에 잠깐 들를 곳이 있다. 거길 가겠다는 결심은 에딘버러에서 본 사진 한 장 때문이었다. 거대한 말머리 조각상 두개가 교차하는 묘한 사진이었다. 조각상 아래 함께 찍힌 사람들은 점처럼 작았다. 세상에 저런 것이 존재한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비현실적인 사진이었다. 두 눈으로 꼭 확인하고 말겠다는 생각을 그때 했었다.


M80 고속도로는 한시간 만에 우리를 근처로 데려간다. 커다란 원형교차로를 돈다. 헬릭스 파크 앤 켈피스Helix Park & Kelpies 이정표를 따라 방향을 잡는다. 규모가 엄청난 공원을 가로지른다. 저 멀리 사진에서 본 말머리가 하늘에 걸려 있다. 최대한 가깝게 주차하고 조각상을 향해 걷는다. 눈 앞에 나타난 압도적 스케일에 저절로 입이 열린다. 말머리가 가까워질수록 하늘이 점점 작아진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30미터가 넘는 거대한 높이와 볼륨감, 게다가 아름답다. 사진보다 백배는 더 놀랍다. 말머리 조각상은 무려 990개 철판을 레고처럼 조립해서 만들었다. 물론 똑 같은 철판 모양은 하나도 없다. 무게는 자그마치 600톤이 넘는다. 공공미술 스케일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거대하다. 처음 여기에 저런 것을 만들겠다고 생각한 사람이 너무 궁금하다. 


앤디 스콧Andy Scott은 스코틀랜드 신화에서 영감을 얻었다. 작품명인 <켈피스The Kelpies>는 켈피Kelpy의 복수형이다. 켈피는 스코틀랜드 전설에 등장하는 물의 정령이다. 신화에는 열 마리 말을 합친 힘과 끈기를 가진 물에 사는 말water horse로 묘사하고 있다. 작가는 켈피 신화와 관련 깊은 여기에 켈피스를 부활시킨 것이다. 


북해가 내륙으로 가장 깊이 들어온 곳에 켈피스가 있다. 글라스고를 흐르는 클라이드Clyde 강과 북해로 향하는 포스Forth 강을 잇는 포스 앤 클라이드 운하Canal가 시작하는 지점이다. 그 관문에 켈피스를 만든 것은 우리식 표현으로 풍수적인 영향이 크게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 힘과 생동감 넘치는 역동적인 켈피스가 살아 움직일 것 같다. 


켈피스 주위로 동그랗게 조성된 길이 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켈피스는 다른 포즈를 취한다. 동그란 길과 이어진 길을 조금 더 거닌다. 북해와 아일랜드해를 가로로 잇는 운하를 따라 만든 운치 있는 길이다. 둔바는 아직 100킬로미터가 남았다. 저녁 시간이 훌쩍 지났지만, 해는 아직 멀쩡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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