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아침 햇살에 눈을 뜬다. 바람을 맞으며 기지개를 켠다. 축구장 수십개는 만들 넓은 잔디밭에 우리 말고 다른 텐트는 하나뿐이다. 해풍을 막아주는 우거진 나무숲과 나란히 키를 맞춘 수평선 풍경이 아름답다. 오두막 같은 놀이터에 우리집 아이 둘과 다른 텐트 여자 아이 둘은 이미 친구가 되어있다. 하늘과 땅이 지분을 똑같이 나눠 가진 평온한 땅에서 맞는 멋진 아침이다.
아내와 주변을 산책한다. 무너진 고터들이 드문드문 눈에 띈다. 해안가 작은 마을 둔바는 예부터 전쟁이 잦았다. 북해에 면한 영국 북쪽 마을 대부분이 그러하듯 이 지역도 바이킹의 공격을 지속적으로 받던 곳이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역사상 가장 유명한 던바 전투는 크롬웰이 스코틀랜드 대군을 격파한 전투다. 클로덴보다 100여년 앞선 1650년 벌어진 일이다. 눈 앞 옛터 잔해들은 대부분 그때 것들이다. 고요한 해변 풍경에서 쉽게 떠올리기 힘든 과거다.
스코틀랜드 여행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내일이면 집으로 간다. 굳이 던바를 숙소로 정한 이유다. 여기는 에딘버러에서 30마일, 잉글랜드 국경까지 30마일 떨어져 있다. 스코틀랜드에서 남은 하루를 온전히 즐기고, 요크로 향하기에 이만한 곳이 없다. 아침을 든든히 먹고 텐트는 그대로 둔 채로 길을 나선다. 여행에서 다시 돌아올 곳이 있다는 것은 큰 위안이다.
2.
런던까지 이어진 A1 고속도로를 런던 반대 방향으로 달린다. 얼마 후, A198 국도로 차를 내린다. 평평한 드넓은 대지가 낯설다. 아직도 하이랜드 풍경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탓이다. 그래도 시골길 풍경은 언제나 정겹다. 길가 낮은 돌담을 지나 바다로 향한다. 바다 위에 섬 하나가 우뚝 솟았다. 섬은 인위적으로 반을 가른 것처럼 한쪽이 삐쭉빼쭉 가파른 절벽이다. 절벽 높이가 107미터에 이른다.
섬이란 일반적인 단어가 낯선 저 섬은 바스 록Bass Rock이다. 왠지 비주얼과 어울리는 이름이다. 화산 활동으로 생성된 바스 록은 그 독특한 모양 때문에 스코틀랜드 소설에 자주 등장했다. 초기 기독교 은둔자들이 정착했다는 고대 예배당 잔해와 1902년 건설된 바스 록 등대가 육안으로도 또렷하게 보인다.
바스 록을 옆에 두고 해안가를 드라이브한다. 반대쪽은 농경지다. 구릉이나 초원이 아닌 농경지가 끝도 없이 펼쳐진 모습은 스코틀랜드에서 처음 본다.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 풍경을 오래 즐긴다. 순간 제주도 오름 같은 것이 예고도 없이 나타난다. 봉긋한 정도가 비현실적인 수준이다. 오름 같은 것이 끝나는 지점부터 깔끔히 정돈된 공원이 시작된다.
공원 이름은 레크레이션 파크Recreation Park다. 해안에 오와 열을 맞춰 길게 늘어선 테니스 코트가 수십개는 넘어 보인다. 그리고 공원이 끝나는 곳에 노스 버윅North Birwick이 있다. 낯선 타운을 여행하는 여행자에게 필수 코스인 여행자센터Tourist Information를 찾는다. 다른 가로수와 구별되는 커다란 단풍나무가 시선을 끈다. 나무를 둘러싼 비상한 벤치도 흥미롭다. 1902년 10월 10일 에드워드 7세가 이곳을 방문해서 식수했다는 푯말이 근사하게 걸려 있다. 대관식이 있던 해였다고 친절히 적어 놓았다. 벤치에 잠깐 앉았다가 가던 길을 간다.
여행자 센터는 구멍가게보다도 작다. 마침 점심시간인지 사무실 문은 굳게 잠겨 있다. 그래도 여행자를 위한 작은 알림판은 사무실 밖에 걸어 두었다. 마을 동쪽에 있는 탄탈론Tantallon 성과 서쪽에 위치한 디어레톤Dirleton 성을 안내하는 글과 총 길이 215킬로미터에 달하는 존 뮤어 웨이John Muir Way에 관한 글이 나란히 붙어 있다. 존 뮤어는 미국 국립공원을 설립한 인물로, 던바 출신이다.
그 아래에 오름 같다던 봉긋한 언덕에 관한 안내글도 있다. 노스 버윅 로우North Berwick Law는 화산 활동으로 만들어진 높이 187미터 언덕이다. 정상에 있다는 고래 턱뼈 모양의 아치 사진이 인상적이다. 내가 사랑하는 휫비에서 쿡 선장 동상 옆에 있던 그것과 판박이다. 진짜 고래 턱뼈 아치는 2005년에 무너졌고, 2008년 섬유 아교로 만든 복제품을 대체했다는 상세한 주석을 달아 놓았다. 노스 버윅도 휫비처럼 한때 고래잡이가 성행했던 곳이다.
3.
여기는 정말로 조용하고 깔끔한 마을이다. 예쁜 꽃밭들이 마을을 뒤덮고 있다. 집에 딸린 작은 정원은 물론 거리 곳곳에도 부지런히 조성해 놓았다. 우리 동네 요크와도 비슷하다. 중세 흔적은 없지만, 귀태가 흐르는 고급진 영국 마을 풍경을 가졌다. 노스 버윅에 철도가 개설된 것은 1850년으로 비교적 이른 시기였다. 그럼에도 산업혁명의 과실은 마을을 우회했다.
노스 버윅이 다시 조명 받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후반이다. 에딘버러와 20마일 떨어진 지리적 이점때문에 휴양지로 성장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더불어 에딘버러로 통근하는 사람들과 은퇴자들 거주지로 각광받으며 한층 더 유명해졌다. 2000년대까지는 스코틀랜드에서 부동산 가격이 가장 비싼 해안 도시였다고 한다. 지금은 세인트 앤드류스에 1위 자리를 물려줬다.
해안이 나타난다. 바다로 나간 길이 모래사장 해변을 좌우로 나눈다. 오른쪽은 밀시 해안Milsey Bay이다. 멋진 아웃터를 입은 조각상이 망원경으로 바다를 응시하고 있다. 망원경 끝에는 바스 록이 햇살을 받아 자그맣게 빛나고 있다. 시선 아래 해변은 보고도 믿기 힘든 낯선 광경을 연출한다. 커다란 야외 풀장이 바다와 맞닿아 있다. 풀장은 거친 시멘트로 경계를 쌓았다. 밀물에 물을 채우고 썰물에 사람을 채운다. 바다까지 와서 풀장에서 해수욕을 즐기는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The open air swimming pool이란 정직한 이름을 가진 풀장은 1840년대 만들어졌다. 이곳은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중반까지 노스 버윅의 핫플이었다. 토요일 밤에 열린 나이트 댄스는 스코틀랜드에서 가장 인기있는 아이템이었다. 이를 증명하듯 1960년대 사진들이 해안가에 걸려 있다. 풀장과 항구에 딸린 부속건물까지 인산인해를 이룬다. 지금도 풀장 안은 사람들로 가득하다. 다시 밀물이 들면 깨끗한 바닷물이 풀장을 다시 채울 것이다. 아주 신박하다.
4.
바다를 가르는 길 끝에 멋진 건물이 있다. 경이로운 스코틀랜드 해양 환경을 유지하고 관리하는 자선단체, 씨버드 센터Seabird Centre다. 2000년에 건립된 건물은 센터 취지에 맞게 자연친화적으로 지어졌다. 단지 건축 재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소요되는 모든 에너지를 태양열과 풍력만으로 충당한다. 센터 안에는 다양한 해양 액티비티를 소개하고 체험하는 샵들이 들어 있다.
라이브 카메라Live Camera 코너가 호기심을 끈다. 인근 섬들에 카메라를 설치해서 새들이 움직이는 모습과 바다 풍경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다. 관람객들이 카메라를 직접 작동할 수도 있어 재미가 두배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차례를 기다리고 있다. 동선이 우리를 기념품점으로 안내한다. 상품 개발에는 여력이 없는지 관심 가는 기념품은 없다. 갈매기 떼가 하늘로 오르는 사진 위로 홍보 문구(Fly down to the Discovery Centre)가 적힌 홍보물이 상점을 빈틈없이 채웠다. 넓은 공간이 복잡해 보이는 효과를 준다.
다시 돌아온 밀시해변에 아이스크림 차가 등장했다. 아내와 해안가에 걸터앉는다. 아이들은 바다에 발을 담그겠다며 아이스크림을 들고 뒤뚱거리며 멀리까지 간다. 해변은 짧은 모래사장 끝에 긴 화성암 바위들로 채워져 있다. 땅 위로 터져 나온 용암이 급하게 식으며 형성된 바위들이다. 아이들이 흠뻑 젖어서 돌아온다. 바다에 들어갈 계획이 없었으니 여분의 바지도 신발도 있을 리 없다. 입고서 말리는 수밖에 없다.
길 왼쪽 해변은 웨스트 만West Bay이다. 작은 요트들이 해안에 가득하다. 그 너머로 노스 버윅 골프클럽이 보인다. 흰 요트와 푸른 바다와 대비되는 초록빛 그린이 선명하다. 캐디백을 둘러 맨 젊은 여성이 혼자 라운딩을 즐기고 있다. 한국에선 상상할 수 없는 호사가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길과 골프장 경계에서 알림판 하나에 시선이 머문다. 바다 프린지FRINGE by the SEA를 홍보하는 포스터다. 에딘버러 프린지 기간에 노스 버윅에선 바다 프린지가 열린다는 이야기는 처음 듣는 뉴스다.
한때 노스 버윅은 북쪽의 비아리츠Biarritz of the North로 불리길 원했다. 비아리츠는 프랑스 서남부에 있는 휴양지다. 충분히 아름다운 노스 버윅이 굳이 북쪽의 비아리츠라는 타이틀에 애착을 가진 이유를 모르겠다. 북쪽의 아테네가 되길 바랐던 에딘버러 이야기를 들었을 때 만큼이나 마음이 씁쓸하다.
5.
톰톰에 에딘버러를 찍는다. 에딘버러와 프린지에 마지막 인사는 하고 싶은 마음에 마지막 저녁을 빅토리아 테라스로 정했다. 에딘버러 성 건너편에 주차한다. 머리에 저장된 지도를 갈무리하며 거침없는 걸음을 내딛는다. 이제 프린지는 절정에 이르렀다. 모든 전시장과 공연장이 인산인해다. 광장조차 발 디딜 틈이 없다.
글라스 마켓 스퀘어에서 올려다보는 에딘버러 성은 아찔할 정도로 아름답다. 1791년 하얀 숫사슴 여관The White Hart Inn에 스코틀랜드 국민 시인, 로버트 번즈Robert Burns가 묵었다는 명패도 발견한다. 테라스로 올라가는 길에서 찾은 OINK라는 식당도 반갑다. 통째로 요리된 돼지를 조금씩 해체해서 판다. 돼지머리에 박힌 날카로운 칼끝은 피부 아래 감춰져 보이지 않는다. Diagon Alley도 들른다. 해리포터처럼 마법지팡이를 찾아 골목골목을 누빈다.
빅토리아 테라스는 운치 있는 빅토리아 시대를 즐기며 가장 멋진 저녁을 감상하는 에딘버러 최고의 장소다. 스코틀랜드 여행 마지막을 장식하는 세레머니 장소로 이만한 곳이 없다. 테라스 가장 안쪽에 있는 The Castle Arms Bistro에 자리를 잡는다. 와인과 스테이크와 디저트까지 갖춘 호사를 부린다. 글라스고 성인 문고Mungo의 이름을 빌린 라거 맥주도 곁들인다.
아이들은 식사를 얼른 끝내고 지난번처럼 테라스 곳곳을 다시 누빈다. 1829년에 시작해서 1834년에 완공된 유적지를 놀이터로 만들어 버린다. 덕분에 아내와 나는 이렇게 멋진 저녁을 최대한 한가롭게 오래 즐긴다. 해거름이 내려앉는 절정의 시간을 기다리기에 영국의 여름은 해가 너무 길다는 것이 아쉬울 따름이다.
로열 마일을 걷는다. 긴 그림자가 매달린 엄청난 인파 속을 우리도 분주히 움직인다. 새로운 퍼포머들이 새로운 로열 마일을 꾸며 놓았다. 프린지가 처음인 것처럼 프린지를 즐긴다. 주차장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 아쉽다. 순간 에딘버러 검은 하늘에 폭죽이 터진다. 우리의 스코틀랜드 여행 마지막을 알기라도 하는듯 절묘한 타이밍이다. 에딘버러를 한참 더 노닐다가 늦은 밤길을 더듬어 둔바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