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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an Karl Oct 30. 2022

29. 애니크 성에 사는 북쪽의 사자

1.

오늘도 어제처럼 찬란한 아침이다. 텐트 밖은 칠성급 호텔보다 아름답다. 느긋하게 텐트를 걷어 햇볕에 말리고 백만불짜리 풍경에서 속을 채운다. 이제 A1 고속도로를 타고 리즈까지 갔다가 외곽 도로에서 요크로 빠지면 집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행자의 본분이 아니다. 집으로 가는 길에 애니크Alnwick 성을 구경하기로 한다. 성은 해리포터 영화에서 호그와트 마법학교 촬영지로, 영국 드라마 <다운튼 애비> 촬영지로 쓰였다. 긴 여행을 장식하는 마지막 방문지로 부족함이 없는 특별한 성이다. 


고속도로가 점점 북해와 가까워진다. 스코틀랜드 국경에 이르자 해안가에 바짝 붙는다. 풍경이 묘하게 바뀐다. 스코틀랜드적이던 것이 잉글랜드적인 것이 되고 있다. 한 시간쯤 더 달리다가 B6341국도로 차를 옮긴다. 한적한 영국 시골길은 언제나 옳다. 오늘처럼 바람 없는 맑은 날은 더 그렇다. 길을 구릉과 구분하던 나무 펜스가 벽돌담으로 변신한다. 드디어 저기 대평원 끝에 애니크 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잘 정돈된 길이 짙은 녹음을 뚫고 성을 향해 있다. 성 주변을 휘감은 해자가 넓고 깊다. 한 사내가 마른 해자 건너로 활시위를 당긴다. 중세 군인 복장이다. 화살이 과녁 한 가운데 꽂힌다. 성 입구에는 어깨에 긴 총을 맨 늙은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다. 이번엔 빅토리아 시대 보병 복장이다. 군인은 사진 찍자는 모든 관광객들을 친절하게 응한다. 군기보다 넉살이 한가득이다. 아이들 머리에 모자를 씌우고 총까지 건넨다. 


2.

성 안에 들어가려면 벽돌로 만든 좁고 긴 터널을 지나야 한다. 잠깐 하늘이 열리고 다시 좁고 긴 벽돌길이 이어진다. 어떤 적도 쉽게 여기를 통과할 수는 없다. 터널 바깥은 다른 세상이다. 동화책에서 봤을 법한 아이코닉한 성과 시원하게 펼쳐진 푸른 잔디밭, 그리고 견고한 성벽이 그 모든 걸 에워싸고 있다. 성벽은 10미터는 거뜬히 넘을 만큼 아찔하게 높다. 언덕 위에 성벽을 두르고 성채를 보호하는 motte-and-bailey 형식의 전형이다. 마치 성벽 너머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성벽만큼만 하늘이 갇혀 있다.


애니크 성에서 반드시 해야 하는 일이 있다. 바로 Broomstick(대가 긴 빗자루) Training이다.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 해리포터가 받았던 비행 수업을 재현하는 프로그램이다. 영화처럼 해리포터가 수업 받던 높은 성벽 아래가 훈련장이다. 티켓을 접수하고 순서를 기다린다. 노란 후드를 맞춰 입은 학생 수십명이 훈련을 받고 있다. 후드에는 Durham School Summer Camp라는 큼직한 글씨가 적혀 있다. 


브룸스틱 수업은 빗자루로 비행하는 기본기를 익히는 것이 핵심이다. 마법사 복장 교관들이 시범을 보인다. 브룸스틱에 올라타고 내리는 법, 코너를 돌고 기동하는 법, 가속과 감속하는 법 등을 세심히 가르친다. 영국 사람들이 놀이에 임하는 진지한 태도는 언제 봐도 재미가 있다. 우리도 30분간 진행된 트레이닝을 마치고 해리포터처럼 브룸스틱을 가지고 신나게 논다. 


수업에서 배운 기술 중에 가장 중요한 기술은 착시를 일으키는 기술이다. 브룸스틱을 수평으로 잡고 손을 놓는 순간 사진을 찍는다. 사진 속에는 마치 브룸스틱이 저절로 날아오른 것 같아 보인다. 브룸스틱을 가랑이에 끼고 뛰어오른다. 순간이 찍힌 사진에는 흡사 하늘을 날고 있는 것 같다. 페이크를 만드는 신기한 사진놀이에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아이와 어른이 따로 없다. 


3.

이번엔 성채 안을 구경할 차례다. 길 한쪽에 커다란 다운튼 애비 배우들 사진이 걸려 있다. 촬영장 뒷이야기를 담은 짧은 필름이 쉼없이 돌아가고, 작은 소품부터 의상, 마차 등 촬영에 쓰인 각종 물건들을 전시하는 공간이다. 애니크 성은 2014년 크리스마스 스페셜 편에 주요 촬영지였다. 특히 호화로운 이탈리아 궁전 스타일을 가진 the State Rooms이 유명하다. 르네상스 양식으로 만든 방을 빅토리아 풍 인테리어로 장식했다. 방 전체를 보석으로 치장한 듯한 화려함은 가히 압권이다. 이처럼 영국을 대표하는 영화와 드라마에 두루 쓰일 만큼 여기는 영국 사람들이 자랑할 만한 영국적인 성이다. 


날아온 라자냐 냄새가 허기를 깨운다. 맞은 편이 식당이다. 라자냐와 패스티, 스콘으로 간단히 식사한다. 라자냐를 빼면 잉글랜드 최남단 콘월 음식들이다. 식탁으로 쓴 야외 벤치 옆에 기념품점이 있다. 주로 해리포터 관련 기념품을 판매한다. 소설과 영화에 푹 빠진 준하준서 눈빛이 반짝인다. 샵을 종황무진 누비더니 기념품을 내민다. 준하는 해리포터, 준서는 덤블도어 마법 지팡이를 선택했다. 스탠다드한 걸 좋아하는 준하와 개성 넘치는 걸 즐기는 준서 취향이 그대로 묻어난다. 


성채 벽에 그려진 사자 그래픽을 보고 준하가 뛰어 간다. 준하가 좋아하는 영국 프리미어리그 로고를 닮았다. 준하는 프리미어리그 20개 구단 선수들 이름을 줄줄 꿸 만큼 열성 팬이다. 사자 그래픽은 애니크 성 주인, 퍼시Percy 가문을 상징하는 문장이다. 예로부터 퍼시 가문은 북쪽의 사자Lions of the North로 불렸다. 사자 그래픽 아래에 하얀 글씨가 적혀 있다. ‘Celebrating 700Years of the Percy Family at Alnwick’.


700년 동안 애니크 성과 함께한 퍼시 가문의 놀라운 역사도 전시하고 있다. 1309년부터 100년 단위로 이야기를 풀어 놓았다. 1309년 헨리 퍼시Henry Percy가 더럼 주교로부터 노르만 양식의 성을 사들인다. 그리고 40여년간 아들과 함께 애니크 성을 강력한 국경 요새로 개조한다. 이후 수세기 동안, 스코틀랜드 침략을 막는 진지로, 스코틀랜드 침공을 위한 교두보로 역할을 수행하며 잉글랜드 북동부 최고의 거점이 되었다. 성 입구에 있던 좁고 긴 벽돌 터널과 그 위에 설치한 감시 망루는 영국에서 가장 훌륭한 방어 구조물로 꼽힌다. 그것은 1475년에 만들어졌다. 


4.

북쪽의 사자로 추앙 받던 퍼시 가문이 위기를 맞은 것은 18세기다. 직계 혈통이 끊긴 것이다. 당시 가문의 상속녀는 노섬벌랜드Northumberland 백작과 결혼하며 명맥을 잇는다. 백작은 퍼시 가문의 상징인 애니크 성을 손본다. 동화적인 고딕Fairytale Gothik 스타일로 성을 증축하고 주변에 공원을 조성한다. 이때가 1766년이다. 그리고 1865년, 이런 동화적인 스타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네번째 공작은 예전 국경 요새로 쓰던 쓰임새에 맞게 성을 복원할 것을 지시한다. 


그런데 복원을 맡은 Anthony Salvin이란 건축가가 선택한 복원 기조는 크고 호화로운 바로니얼Baronial 양식이었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의 온갖 새로운 기술들을 활용해서 성 전체를 리모델링한다. 다운튼 애비에 등장한 the State Rooms도 이때 조성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보는 애니크 성 이미지의 많은 부분은 이때 완성된 것이다.


또한 애니크 성은 퍼시 가문과 함께 시대가 요구하는 방향에 따라 쓰임을 달리 했다. 한때는 국경의 전초기지로, 때론 대학으로, 피난처로 각각 다른 역할을 부여받았다. 그럼에도 퍼시 가문이 사는 집이 아니었던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지금도 12번째 노섬벌랜드 공작, 랄프 퍼시Ralph Percy와 아내가 여기 살고 있다. 


푸른 잔디밭에서 공연이 펼쳐진다. 제목이 <Jesters>다. 제스터는 왕이 부리던 어릿광대를 뜻한다. 어릿광대로 분장한 배우들이 개그와 스랩스틱, 묘기와 마술을 곁들이며 모여든 관객들을 쥐락펴락한다. 감시 망루 위에 사람 형상 조각이 파란 하늘에 선명하게 걸렸다. 마치 망루를 지키는 사람처럼 착시를 일으키게 중세 시대 장치물이다. 공연만큼 코믹하면서 현대적이다. 


애니크 성을 나와 애니크 가든을 보러 간다. 성에서 지척이다. 담벼락 너머로 소박한 듯 우아한 The Treehouse의 인상적인 모습만 눈에 담는다. 


요크 집까지는 아직 2시간여가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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