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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즈 Dec 30. 2021

커피 못 마시게 해서 더위사냥 녹여먹은 적 있는 사람?

믹스커피 찍은 에이스만 허락하는 건 너무하잖아요



 해가 따뜻한 주말. 점심을 먹고 나면 어머니는 종종 후식을 즐기셨다. 에이스와 믹스커피. 예나 지금이나 환상의 조합인 건 변함없다.


"나도 커피 마실래."

"안 돼. 머리 나빠져."


 내게 커피를 맛볼 수 있는 기회는 믹스커피에 빠졌다 나온 적당히 눅눅한 에이스를 먹을 때뿐이었다. 커피를 마시는 건 절대 금지였다. 머리가 나빠진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커피와 지능은 전혀 관계없다. 커피를 많이 마신다고 머리가 나빠졌으면 난 지금쯤 이 글을 적지도 못할 처지였을 테다. 그보다는 카페인이 특히 어린이에게 좋지 않으니 못 마시게 했다고 하는 게 더 납득이 갈 만한 이유이긴 하다. 어쨌거나 나는 믹스커피를 즐기는 어머니를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고소하고 달큼한 향이 얼마나 매혹적인가. 마치 지하철역 델리만쥬급이다.


 하루는 주방을 어슬렁거리다 어머니께서 믹스커피를 뜯는 것을 보고는 열심히 투정 부렸다. 나도 한 잔만 마시게 해 달라고. 당연히 결과는 안 된다는 말뿐이었다. 어머니께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긴 후 낮잠을 청할 동안 다시 부엌으로 향했다. 지금이 기회다! 하지만 믹스커피는 내 손이 닿지 않는 찬장에 있었기 때문에 몰래 꺼내 마실 수 없었다. 젠장. 그러다 문득 머릿속에 '이거다!'하고 스쳐간 생각이 있다. 이른바 짝퉁 믹스커피. 바로 더위사냥 아이스크림을 녹여서 커피처럼 마시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커피는 안 된다면서 커피맛 아이스크림은 먹게 해 주셨던 게 조금 아이러니하다)


 당장 내 물컵에 남은 물을 비우고 더위사냥을 뜯어 거꾸로 꽂았다. 근데 이거,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꽁꽁 얼어붙은 더위사냥을 냄비에 넣고 끓이지 않는 이상 족히 몇 시간은 기다려야 한다. 10년 남짓한 인생에서 가장 힘든 인내의 시간이었다. 그렇게 다 녹아버린 더위사냥은 컵의 1/3을 채웠다. 와, 나도 이제 믹스커피를 마실 수 있다! 그러나 기대와 다르게 맛이 없었다. 정확하게는 믹스커피 느낌과 달라 그다지 끌리지 않았다. 걸쭉하고 이상한 느낌. 당연히 그럴 수밖에. 이건 진짜 믹스커피가 아니라 믹스커피맛을 낸 아이스크림을 녹인 것에 불과하니까. 아이스크림은 아이스크림 모습일 가장 맛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년이 지나 고등학생이 되고 나서야 본격적으로 커피를 마실 있었다. 어릴 때는 믹스커피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건만, 고등학생 때 으른의 맛을 알아버렸으니 지금까지도 아메리카노가 기본. 대학생 때는 하루에 빽다방 사이즈로 2~3잔이었다. 반동 효과도 아니고 그때 못 마셔본 커피를 들이붓는 수준이었다. 정말 으른을 넘어 초인의 경지에 다다랐다. 물 대신 커피를 마시고 혈관에 피 대신 아메리카노가 흐른다 해도 이상 할 것 없었다. 지금 그렇게 마시라고 하면? 절대 안 마신다. 못 마시지는 않지만 안 마실 거다. (이게 무슨 술도 아니고 마시냐 안 마시냐를 논하고 있다) 


 오랜 시간 거의 매일 커피를 달고 사니 나와 커피의 궁합이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커피를 마셔도 잠을 잘 잔다. 심지어 저녁에 마셔도 때 되면 쿨쿨 잘만 잔다. 심장이 과하게 두근거리지도 않는다. 다만, 그렇게 카페인을 들이붓다 보니 부작용이 딱 하나 있었다. 손이 달달 떨린다. 가만히 있을 때에도 달달달. 그 사실을 안 후로 지금은 8개월째 두 잔에서 한 잔으로, 카페인에서 디카페인으로 조금씩 줄여가고 있다. 커피와 가까워지지 못해 안달이었던 사람이 이제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있다니. 취향도 입맛도 버릇도 모두 변했다. 


 그래도 가끔은 날 좋을 때 어머니와 경치 좋은 카페도 가보고, 산책 겸 집 근처 카페도 간다. 이제는 어머니와 함께 커피를 마실 수 있어 좋다. 더 이상 한 잔만, 아니 한 입만을 외치지 않아도 된다. 나 이만큼 자랐어요 너스레도 떨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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