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린세스 메이커3를 추억하며
어제는 거의 20시간을 내리 디비 잤다. 오전 11시에 일어나서 잠깐 글을 쓰고 대충 끼니를 해 먹고 다시 누웠다. 역류성 식도염 걸리라고 물 떠놓고 기도하는 수준으로 바로 잠들어버렸다. 오후 4시가 돼서야 다시 깼다. 밖에는 비가 찔끔찔끔 내리고 있었다. 컴퓨터를 끄듯이 세상이 이대로 끝나버리는 건 어떨까 잠시 생각하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처럼의 휴일이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쉬는 날에 종종 방문하는 죄책감도 오늘은 오지 않았다. 그 감정들도 오늘은 휴가를 보냈다. 매일 마시는 모닝커피를 마시지 않았더니 잠을 자도 자도 졸렸다. 다시 자리에 누워 유튜브를 보며 낄낄대다가 뭔가에 홀린 듯이 요리를 했다. 저녁을 대충 또 해결하고 다시 자리에 누웠다. 다마고치도 휴일에 이 정도로 자진 않겠지.
실제로 다마고치는 비싸서 해본 적이 없지만 누나들 따라서 프린세스 메이커 같은 육성게임은 해본 적이 있다. 실제로 아주 잘했다. (공주엔딩, 마왕엔딩 다 봤음.) 캐릭터를 키우다 보면 일주일에 하루는 꼭 휴식을 넣어야 했다. 안 그러면 병이 걸리던가 반항아(?)가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원하는 엔딩을 보려면 나름 아주 정교한 일과를 보내야 했다. 무조건 부잣집에서 좋은 것만 하고 자란다고 프린세스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적당히 알바도 시키고 교육도 시키고 바캉스도 종종 보내야 한다. 그러다 보면 운 좋게 축제 같은 곳에서 왕자를 만나고 왕실에 들어가면 프린세스가 되는 엔딩을 볼 수 있다. 물론 프린세스만 진엔딩은 아니고 다양한 엔딩들이 존재했다. 아마 두더지 왕자랑 결혼하는 엔딩도 있었다. 전문직이나 기사나 농부가 되는 엔딩들도 아주 훌륭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열심히 키우다가 엔딩을 보는 마지막 장을 넘길 때의 그 설렘과 희열이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난다.
누군가가 게임 캐릭터처럼 키운다면 나는 지금 뭐가 된 것일까. 일과라고는 하루하루 이름을 붙이기 어려운 복잡하고 입체적인 날들을 보내고 있다. 휴식이란 일과를 몇 주만에 넣었다고 삐뚤어질 여유도 없다. 무언가 잘못되면 책임을 물을 사람은 오로지 나 자신밖에 없다. 내가 나를 키우고 있구나. 그런 생각이 들자 내가 좋은 양육자는 아니라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좋은 양육자가 되지 못해도 잘 자라주고 있는 내 안의 어린아이가 (현재 나이 30세) 조금은 기특하고도 안타까웠다.
인생을 무언가가 되는 엔딩을 보기 위해 사는 것은 아니지만 어린 날에는 이 정도의 나이가 되면 그래도 무언가는 되어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저 나 자신이 되기에도 녹록지가 않다. 하루하루 떳떳하게 살아내기에도 급급하다. 부끄럽지 않으려 끙끙대며 살아내다 보면 뭐 하나 또 대단히 이루어내지 못했음에도 내 일과는 휴식과 또 멀어져 있는 걸 발견한다. 걷고 걷고 또 걷다가 오늘은 어제보다 얼마나 멀리 왔나 뒤를 돌아보며 손바닥을 눈금 삼아 거리를 재고 있는 내 모습이 조금은 애잔하여 20시간을 내리 자는 휴식을 일정에 넣게 된 것이다. 아무런 꿈도 아무런 잡념도 없는 달콤한 잠을 자고 일어나니 나는 어제보다 손바닥으로는 잴 수 없는 많은 거리를 날아왔다는 것을 알았다. 인생이란 여정에 휴식 또한 여정이었음을 깨닫는다. 어제의 달콤함을 소화시키고 오늘의 씁쓸한 하루를 마시며 꿈꿔본다. 내 일과의 마지막 장을 넘겨 엔딩을 볼 때에도 언젠가의 그 설렘과 희열이 생생하고도 낭랑하게 가득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