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은 존엄하지 않았는데, 왜 죽음은 존엄해야 하는것인가
존엄사, 정말 존엄한가요?
나는 매일 이른 아침 센터를 열며,
건강한 삶을 위해 운동에 몰두하는 사람들을 마주한다.
그들은 아프지 않기 위해, 오래 살기 위해, 자신을 단련한다.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땀을 흘리는 모습은 어쩌면 당연하고 필사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그 장면들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건 어쩌면 몸부림이 아닐까."
생존을 향한 치열한 사투처럼 보이던 그 모습에서
나는 순간 나지막이 조소를 흘린 적이 있다.
나 자신도 모르게.
웃기기도 했고, 허무하기도 했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보다도 죽음을 두려워한다.
삶은 언젠가 끝난다는 걸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그걸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건 다른 일이다.
나는 죽음이 너무 무섭다.
그래서 안락사, 존엄사 같은 단어에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하고,
그 의미를 자주 찾아보곤 했다.
어느 날 접한 기사 하나가 떠오른다.
스위스에서는 고액의 비용을 내면 안락사가 합법적으로 가능하다는 사실.
나는 거기서 이상한 모순을 느꼈다.
죽기 위해서조차,
사람은 돈을 지불해야 한다는 사실.
죽음마저도 자본의 질서 속에 있다는 것.
그것은 내게 깊은 질문을 남겼다.
그들은 왜 돈을 주고 죽음을 택하는가?
죽음은 정말로, 살아 있는 삶보다 더 존엄할 수 있는가?
우리는 말한다.
"죽음을 존엄하게 맞이하자"라고.
"마지막은 스스로 결정할 수 있어야 한다"라고.
그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 말이 나에겐, 어쩐지 우습고 허무하게 들릴 때가 있다.
왜 죽음이 존엄해야 하는가?
애초에 삶이 그렇게 존엄하지도 않았는데.
삶은 고통스러웠고,
누군가는 간신히 하루를 버티며 살아왔으며,
어떤 이들은 스스로를 증명할 기회조차 없이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만큼은 아름답고 품위 있게, 존엄하게 맞이하자고 한다.
그건 역설이다.
우리가 삶에서 잃어버린 존엄을,
죽음에서라도 되찾고 싶어 하는 인간의 마지막 저항 아닐까.
그렇다면 진짜 존엄한 죽음이란 어떤 것일까?
연명치료를 중단하고, 점차 죽음에 이르게 하는 '존엄사'?
의사가 약물을 투여해 고통 없이 생을 마감하는 '안락사'?
둘 다 정말로 고통이 없는가?
그 선택은 자유인가, 절망인가?
나는 지금도 모르겠다.
그리고 여전히 죽음이 두렵다.
하지만 이 두려움은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아직 내 안에
살아 있고 싶다는 의지가 남아 있다는 뜻일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은
죽음을 어떻게 마주하고 있는가?
당신에게 '존엄한 죽음'이란 어떤 의미인가?
삶보다 더 존엄한 죽음이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아니면 그 모든 말이 결국
삶이 너무 고통스러웠다는 또 다른 표현에 불과한 걸까?
당신의 생각이 궁금하다.
그 생각을 함께 나눌 수 있다면,
이 무거운 질문도 조금은 가벼워질지 모른다.
나는 여전히 죽음에 대한 대답을 찾고 있고 듣길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