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현실 같았던 '나락'에서 다시 일어서기:극락과 나락의 공존
그때 우리는 행복했다.
아니, 어쩌면 '행복하다'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그 믿음은 오래도록 지속될 줄 알았다.
우리만은 예외일 거라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꽉 채워진 삶이었다.
해외여행은 연 2회,
주말이면 근교로 떠나 힐링하고,
식사는 거의 외식.
좋은 차,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장소.
각자 마음에 드는 수입차를 몰았고,
딸아이에겐 늘 '최고'를 주고 싶었다.
그게 사랑이고,
그게 부모의 도리라 믿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랑스러웠던 건
대한민국 상위 1%의 연봉을 받던 아내,
그녀는 여성으로서 오를 수 있는 최정상의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었다.
내 아내였고, 내 파트너였고,
세상이 알아주는 성공한 커리어우먼이었다.
내가 운영하던 헬스클럽도 제법 잘 나갔다.
크게 욕심을 낸 것도 아니다.
도심도 아니었고, 그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
먹고살 수 있는 만큼만 잘되면 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의외로 잘됐고, 잘되다 보니 욕심이 생겼다.
한 층을 더 올리고 싶었다.
시설을 더 넓히고, 더 좋게 만들고 싶었다.
첫 번째 대출은 그렇게 시작됐다.
아내도 내 결정에 힘을 실어줬고, 우리는 앞으로 더 잘될 거라 믿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확장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원 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소문도 없었고, 경쟁업체도 없었다.
그냥 이유 없이, 하나둘 떠났다.
매출은 급감했고,
사업장은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나는 버티고 있었지만, 삶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아내는 생활 유지를 위해 추가 대출을 실행했다.
카드값, 리스료, 교육비, 외식비... 못먹고, 못입어서가 아닌
우리가 누리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그녀는 하나씩, 또 하나씩 조용히 자기 이름으로 대출을 늘려갔다.
처음엔 내가 알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면, 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다.
익숙한 소비와 빠른 루틴 속에서
불길한 감정들은 뇌리에서 금세 사라졌다.
내가 사업에 실패했다는 현실보다 더 무서웠던 건,
그 실패가 이미 너무 오래전부터 시작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어느 날,
우편함에서 수북이 쌓인 1금융, 2금융권의 고지서를 들고
거실로 들어온 순간,
나는 나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녀는 나를, 우리를,
우리가 살아온 그 '모양새'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조용히 담보로 걸고 있었다.
그날 우리는 크게 다퉜다.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어떻게 그럴 수 있었어?"
하지만 그 순간,
내 입에서 나온 말보다 더 날카로운 건
내 안에 스스로에게 던진 말이었다.
나는 왜 몰랐을까.
아니, 왜 알면서도 모른 척했을까.
한참을 다투고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배신감보다 더 아팠던 건
그 모든 상황에서 나만 빠져나오려
필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이던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그게 역겨웠다.
그리고 얼마 후,
아내는 이미 회사를 그만둘 결정을 오래전부터 준비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사업에 실패한 그 시점 즈음,
그녀는 사직서를 냈다.
이유는 단순했다.
"그냥, 더는 버틸 수 없어서."
모든 게 비현실 같았다
어느 밤,
불 꺼진 거실소파에 멍하니 앉아서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이건 누군가가 짜놓은 시나리오가 아닐까.
우릴 망가뜨리고, 흔들리게 만들려는...
누군가의 실험 같은 현실."
잠들기 직전, 나는 이 현실이 악몽이었으면 했다.
눈을 떴을 때,
다시 아침이 오고
리조트의 햇살 아래 조식 테이블에 앉아 있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현실은 우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 삶은, 그 '모양새'는
이제 감당할 수 없는 무게였다.
무너짐의 연쇄였다.
우리는 결국
60평대 넓은 집을 팔았다.
어릴 때부터 '이런 집에 살아보고 싶다'던 나의 욕망의 결정체.
그 집을 떠나는 날,
딸아이는 말없이 내 손을 잡았다.
아내와 나의 수입차도 모두 팔았다.
더는 '브랜드'를 따질 자격조차 없었다.
양가 부모님께 손을 내밀었다.
모든 걸 다 말해야만 했다.
그리고 우리가 예상했듯이 당연하게, 우리는
양가에서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며느리와 사위는,
더는 그들의 자랑이 아니었다.
다시 살아가기 위해
'자존심'은 가장 먼저 버렸다.
'왕년에', '우리는', '예전엔' 같은 말들은
땅 속 깊이 묻었다.
그저
땅 위로 올라오기 위해,
우리는 뭐든 했다.
어떤 일이든 가리지 않았다.
수치심?
그런 건 이미 한참 전에 버려졌다.
다시 살아야 했고,
딸아이를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
이대로 무너지면 안 됐다.
시간이 꽤 걸렸다.
하지만 우리는
서서히, 아주 서서히 중심을 되찾아가고 있다.
아직도 많은 걸 회복하진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삶이 낯설지 않다.
가끔은, 오히려 지금이 더 '우리 다운 삶'이라는 생각도 든다.
딸아이는 묵묵히 따라와 주었다.
전부 알지는 못하겠지만,
무언가 변했다는 걸 알고 있었을 것이다.
불평 한 마디 없이,
고개를 끄덕여준 딸아이에게
나는 평생을 갚아도 모자랄 고마움을 느낀다.
양가 부모님도
우리의 진심 어린 재기의 몸부림에
조금씩 마음을 열고 계신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아직 숙제가 남아 있다.
서로에게 생긴 상처,
끊어진 신뢰,
복원되어야 할 관계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이 또한, 지나간다는 걸.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예전처럼 잘 살기 위한 아등바등 이 아니라,
지금의 삶에 충실하고자 하는 다짐이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과거를 부여잡지 않는다.
"그때는 잘 나갔는데..." 같은 말은
지금 우리 부부의 언어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삶은 계속된다
인생은 수많은 실패와 후회의 조각으로 완성된다.
우리는 그걸 진심으로 경험했고,
이제는 고개를 숙이지 않고 말할 수 있다.
"그때는 힘들었지만, 우리는 다시 일어섰습니다."
누구든 그럴 수 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도.
경제적, 정신적, 건강적, 관계의 나락에 있다 해도,
그곳이 끝은 아니다.
수많은 명언들이 있지만
지금 우리 부부가 꼭 기억하려는 말은 단 하나다.
"이 또한, 지나가리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