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크가 오기 전 미리 보급해줘야 한다.

위기가 닥치기 전에 현명한 대비책을 마련해 두자.

by 양양이

"봉크(Bonk)"는 마라톤을 하거나 사이클을 타는 사람들에게는 익숙한 단어일 것이다. '벽에 부딪히다(Hitting the wall)'와 비슷한 개념으로, 마치 머리를 둔기로 세게 맞은 것처럼 갑작스럽게 에너지를 잃고 심각한 무기력 상태에 빠지는 현상을 비유한 말이다. 장시간, 장거리 고강도 운동 중 탄수화물이 몸에 저장된 형태인 글리코겐을 모두 소진했을 때 발생하는 저혈당 쇼크를 말한다. 하루에 100Km씩 로드사이클을 타던 나에게는 아주 익숙한 단어이다. 라이딩을 하다 보면 급격하게 체력이 떨어지는데 우리는 '봉크가 왔다'라는 표현을 썼다. 봉크는 서서히 오지 않고, 갑작스럽게 나타나는 증상이기 때문에 봉크가 오기 전에 미리미리 에너지를 보충해줘야 한다. 봉크가 왔을 때는 체력이 떨어지는 정도가 아니고, 곧바로 죽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몸에 기력이 하나도 없어진 것이다. 그때 급하게 에너지를 보급해도 체력이 빠르게 회복되지 않는다. 봉크가 오기 전 미리 기력을 다 소진하지 않도록 예방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다.


제주도에서 로드사이클을 타고 싶었다. 같이 탈 사람이 마땅치 않아 혼자 제주도 라이딩을 하게 되었다. 처음엔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서 해안도로에서 라이딩을 하는 평화로운 나를 상상했다. 하지만 이는 그저 상상일 뿐이었다. 제주도의 바람은 생각보다도 훨씬 강했다. 자전거를 탈 때 가장 강력한 적은 바람이다. 내가 가는 방향에서 맞바람이 불어버리면, 내가 아무리 페달을 저어도 자전거가 앞으로 나가질 않는다. 우연히 뒷 바람이 불면 페달을 굴리지 않고 길을 갈 수 있을 정도로 제주의 바람은 막강했다. 그리고 제주도 라이딩길은 생각보다 아름다운 풍경으로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평지는 없었고 약 오르막길의 연속이었다. 한라산을 가운데 끼고 있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힘든 라이딩에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난다.


하루에 100km씩 1박 2일 안에 완주하기로 마음먹었다. 제주도를 여행으로 온 적은 많지만 자전거를 타러 온 것은 처음이었고, 혼자라서 조금 겁이 나기도 했다. 자전거 타이어에 구멍 났을 때 교체 할 수 있게 수리키트도 단단히 챙기고, 추울 것을 대비해 바람막이도 알뜰하게 챙겼다. 라이딩을 준비하며 가장 대비를 많이 한 것은 곳곳에 편의점과 화장실을 미리 찾아두는 것이었다. 해변과 산속을 넘나드며 라이딩을 하다 보면, 음식을 보급할 곳이 꼭 필요했고, 만약 제시간에 음식을 보급하지 않으면 봉크가 올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라이딩할 때 가장 무서운 시나리오는 보급장소를 찾지 못해서 헤매다 배고파서 쓰러지는 것이었다. 다행히 제주도는 관광지라 편의점과 화장실이 잘 되어 있었다. 그리고 여자 혼자이기 때문에 해가 지기 전에 목표한 숙소에 도착하는 것 그게 가장 중요했다.


강력한 바람을 뚫으면서, 가끔은 아름다운 풍경에 멈춰서 사진도 찍으면서 라이딩을 하고 있었는데 너무 여유를 부린 탓이었을까. 음식 보급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먹은 것이라곤 아점으로 먹은 점심 식사가 마지막이었다. 분명 속도계에 지도를 켜고 라이딩을 했지만 길을 끊겨 있거나 갈림길을 잘 못 든 적도 있었다. 속도계 지도는 믿을 만 하진 못했다. 이런 와중에 하필이면 타이어 바람이 빠져 급하게 자전거 수리 매장도 찾아야 했다. 시간을 생각 외로 지체하게 되었고, 숙소로 가는 길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이미 90km 가까이 역풍을 뚫고 라이딩을 한 상태라 매우 지친 상태였지만 페달을 놓을 수가 없었다. 어두운 제주도 외딴 길을 여자 혼자 라이딩한다는 것은 내가 예상했던 것 중에 가장 최악의 시나리오였다. 얼굴은 이미 흙먼지로 덮였고 땀과 콧물이 범벅이 되어 있었다. 너무 배가 고팠지만 더 어두워지면 숙소를 찾지 못할까 봐 중간에 식사를 하지 않고 발길을 재촉했다. 봉크가 오는 것 같았다. 체력은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봉크가 이미 온 상태면 회복하기 쉽지 않다. 봉크가 오기 전에 얼른 음식을 먹었어야 했다. 하지만 여기서 혼자 쓰러진다고 해서 나를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역풍에 혼자 100km를 라이딩한다는 것은 역시 무리였을까. 하지만 다들 의례 제주도를 하루 만에 돌고 왔다느니, 하루에 100km는 타야 된다느니 이런 말들은 꽤 많은 로드 자전거 마니아들이 하는 당연한 말이었다. 그래서 나도 그 정도는 해야 도전이다 싶었던 것 같다.


눈물을 머금고 한발 한발 겨우 페달을 굴려 숙소에 도착했다. 늦은 시간이라 음식점은 모두 문을 닫았고 편의점에서 아무거나 골라 잡고 닥치는 대로 먹어 치웠다. 음식은 먹고 나서 체내에 쌓이지 않고, 그냥 공중으로 사라지는 것 같았다. 이미 하루 만에 몸무게 3kg 정도는 거뜬히 빠진 것 같았다. 아마 조금만 더 늦었으면 응급실로 실려 갔을지도 모르겠다. 그 다음 날부터는 편의점에서 간식을 잔뜩 사가지고 뒷주머니가 터질 만큼 넣고 달렸다.


그때의 공포가 지금까지도 느껴진다. 핸들을 잡은 손은 후들후들 떨리고, 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데 계속해서 오르막 길을 올라야 했다. 사방은 어둡고 춥고 무섭고 보급 장소를 찾을 수 없었던 그때가 말이다.


위기를 항상 대비한다고 생각했는데, 늘 살아가다가 보면 예상치 못한 다른 위기에 맞닥뜨린다. 세세한 하나까지 전부 대비할 수는 없다. 하지만 위기에도 경험치가 생긴다. 경험이 쌓일수록 위기에 대처하는 방법이 노련해지기 마련이다. 다가올 위기를 대비해 보급 가방 하나정도는 든든히 꾸려 두는 노련미가 필요하다. 어떤 위기에 정면으로 맞아 쓰러진다고 해도, 단단히 꾸려놓은 보급 가방이 있으면 위기를 극복할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언제 가족이 아플지 모르고, 혹은 내가 병에 걸릴지도 모른다. 언제 어디에서 세계적으로 경제 공항이 닥칠지도 모를 일이다. 한 순간에 정리해고를 당할지도 모르고, 사업이 망할지도 모른다. 여분의 대비책을 꼭 갖추고 있어야 위기 타파를 모색할 수 있다. 미리미리 이런 대비를 해둔다면, 기회가 왔을 때도 바로 움직 일 수 있게 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들만 준비를 해두면 된다. 그래야 쓰러졌을 때 다시 일어날 힘이 생긴다. 위기에 대처하는 나의 마음자세부터가 인생을 바꿔 놓을 수 있다. 인생을 완주를 하기 위해서는 단단한 보급백이 필요하다. 위기에 닥치기 전 단단히 미리 대비하자. 내가 걸어가는 그 길은 꽃길만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두운 골목길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때가 올지도 모른다. 돈을 모아두고, 책을 읽고, 여행을 가보고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언제 어디서든지 배움의 자세로 나아가다 보면 위기에서도 스스로 극복해 재기의 힘을 얻을 것이다. 젊음의 반짝임은 언젠가 그 빛을 잃게 되는 날이 오고, 오늘의 영광이 내일도 계속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삶이 다른 방향으로 나갈 수 있다는 걸 언제나 염두에 둔 자가 결국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다. 현명함과 지혜로움을 단단한 보급가방 안에 쌓아둔 사람이야 말로 결국엔 자신이 원하는 인생에 도달할 것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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