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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밀어놓고 혼자 생쇼를 다 하고 있어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소리들을 술 한 잔을 털어 넣고서야 안ㅎ미는 겨우 갈무리 할 수 있었다. 꼭 있다니까, 꼴값을 떠는 것들이. 모두 입 밖으로 나올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자리라는 게 사람을 만들었다. 무작정 날 잡아 잡수, 사는 것은 아니었지만 웬만해서는 참아야 했다. 손톱밑 가시처럼 신경 쓰이지 않으면 웃어야하는 게 매니저라는 직책이었다. 처음 창작촌이 생기고서부터 이 일을 시작했으니 벌써 한 해가 훌쩍 지났던가. 석 달에 한 번씩 입주 작가들이 바꿨다. 다섯 번이 넘는 동안 미는 100명이 넘는 작가들과 만나고 헤어졌다. 함께 부대끼며 흘러가는 일이 나쁘지 않았다. 처음 한두 번은 그렇게 헤어지는 것이 영 아쉽고 쓸쓸하더니 이제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하루하루가 아무런 탈 없이 흘러가기를 바랄 뿐이었다.
어느 날에는 집필실을 하나 달라고 작가 하나가 달려왔다. 막무가내였다. 신청 기간이 끝났으니 다음 해를 기약하자고 했다. 작가는 서울시장이 자신의 후배라며 가만히 놔두지 않겠다고 했다. 네네, 좋은 소리를 하던 미가 그럼, 시장한테 가서 말하세요? 짜증을 섞어 말을 토해놓았다. 그제야 작가는 시설이 어떻다느니, 응대가 어떻다느니, 생난리를 치며 돌아갔다. 그런 날이면 민원이 들어왔다며 서울시 다산콜센터로부터 지청구가 날아들었다. 차라리 나은 편이었다. 인터넷이 먹통이라며 새벽 3시에 손전화를 걸어 신경질을 부리는 작가가 있었고, 술을 마시고 들어와 열쇠가 열리지 않는다는 작가가 있었고, 소나무 밭에서 똥을 싸는 작가가 있었다. 전두환 전 대통령 집을 향해 욕을 내뱉는 작가도 있었다.
씹새야 니가 예수냐! 떡 다섯 조가리하고 물고기 두 마리도 아니고 말야, 이 씹새야! 무슨 이십구만 원으로 팔순 잔치를 해, 이 씨발 넘아. 응. 응 이 씹새, 너 가만히 있어, 응. 내가 총 가지고 말야. 내가 총 가지고 말야. 대대, 대한민국 만세, 자유주의 만세, 민주화 만만세.
아침이 되면 귀신이 외치기라도 했다는 듯 아무도 내가 그랬느니 나서는 작가가 없었다. 그래 귀신이 있기는 할까? 가위가 눌렀다거나 평범한 귀신을 보았다는 것은 다반사였다. 귀신이 소나무 속으로 숨어드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어디서 왔는지 예쁜 여자 몇이 야외공연장에서 밤 새 놀다가 아침이면 여우로 변해 뒷산으로 달아난다고 했다. 최근에는 미디어랩이나 작가 쉼터에서 놀고 있는 하얀 소복을 보았다고 했다.
성의 눈썹도 그들이 가져갔을까? 이빨을 가져가는 까치처럼 귀신이 성에게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기 위해 눈썹을 가져갔을까? 설마! 아무렴! 그 많던 귀신이 왜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인지, 미는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이ㅎ성 작가님, 그러니까 눈썹이 어느 아침에 사라졌다, 이 말이죠? 근데 그게 말이 안 되잖아, 솔직히 말 해봐요. 술 먹고 혼자서 밀어놓고는 괜히 무안하니까 그러는 거죠?
어느 연극판 뒤풀이였을 것이다. 그보다 꽁무니를 쫓는 새침데기와의 술자리가 더 어울리겠다. 연극적 인생이 어쩌니저쩌니 썰을 풀어도 새침데기는 도통 넘어올 기미가 없다. 새침데기는 금세 일어섰고 술자리 끝에 뱉었던 말들이 성을 괴롭혔다. 삶이 미치도록 허무하게만 여겨지는 날이었다.
오래 전 보았던 영화 한 대목, 눈썹을 미는 핑크 플로이드의 시드처럼.
난, 지금 무감각해요. 좋아요. 주사를 놓죠. 이제 기다릴 수 있어요. 조금 따가울 거예요. 참을 수 있겠죠? 아마 효과가 있을 거예요. 좋아요. 공연을 끝까지 해낼 수 있을 거예요. 어서, 공연에 가야해요. 고통은 없어요. 당신도 멀어지겠죠, 저 멀리 수평선 위 배의 연기처럼. 당신도 그 파도 속에 있겠죠. 입술은 움직이지만 무슨 말이지 모르겠어요.
어쩌면 노랫말이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을까, 아름다워서 아플 수 있을까? 그런데 감히 핑크 플로이드를 흉내 내어 눈썹을 밀다니. 하여간 꼭 있다니까, 작가입네 꼴값을 떠는 것들이, 하고 보니 미는 핑크 플로이드를 질투하던 어린 날들이 떠올랐다.
뼈까지 스미는 아픔을 어쩌지 못해 미는 머리를 밀었다. 벌써 십 년이 훌쩍 지난 일이었다. 새삼 시간이 쏜살같음을 느꼈다. 시인처럼 살고 싶었다. 시인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아무 것도 하지 않고는 도무지 견딜 자신이 없었다. 시인이라는 이름을 감히 얻고 보니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부끄러웠다. 가위를 들어 싹둑싹둑 긴 머리를 잘랐다. 비뚤배뚤 엉망인 머리가 못난 시와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미는 일회용 면도기를 사다가 아주 조금씩 머리를 밀어냈다.
아주 오래 지나고서야 그 모든 것들이 어깨에 잔뜩 힘을 주고 떨었던 꼴값임을 알게 되었다. 시만 쓰겠다는 생각을 버리고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 시를 썼다. 버렸던 직장을 다시 얻었다. 창작촌의 매니저가 되어 작가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이별에 대해, 이별의 재구성에 대해 생각할 수 있을 때쯤 비로소 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이별의 재구성』을 엮었다. 고맙게도 상까지 받았다. 껍데기는 가라던 시인의 이름으로 된 상이었다. 껍데기를 벗을 수 있을까, 미는 다시 한 번 두려웠다.
미는 성의 눈썹 언저리를 조심 바라보다가 자신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길게 자란 머리가 고마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