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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에덴 14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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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헌용 Nov 21. 2022

연희

1

 힐끔힐끔 엿보이는 치마 속 빨간 속옷을 생각하며 김ㄷ연은 침을 꼴깍 삼켰다. 빨간이라면 눈썹을 기꺼이 맡겨도 좋았다. 햇살 좋은 풀밭을 떠올렸다. 혹은 작은 방 침대 위가 좋을까. 예수처럼 펼쳐진 연의 두 팔을 빨간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쭉 빠진 두 다리로 지그시 누를 터였다. 숨 막힐 듯 다가서는 분꽃 내음에 취해 배시시 웃음을 흘릴 때쯤 날아드는 지청구. 나쁜 새끼, 니가 날 두고 딴 년을 만나, 이번에는 또 어떤 년이야, 응, 응? 나쁜 새끼. 넌 내꺼야, 내꺼라고. 빨간의 입에서 술처럼 달콤한 욕이 튀어나왔다. 빨간이 고운 손을 들어 연의 앞머리를 뒤로 넘기고 준비해둔 일회용 면도기로 눈썹을 쓰윽 쓱 밀기 시작했다.

 꼭 일회용이래야 해요. 것도 양날로다가. 그게 근방 털이 꽉 차거든. 그럼, 잘 안 밀려요. 그때부터 손에 힘이 들어가 살도 좀 찢어지고, 그래야 부들부들 온몸이 짜르르 해사? 

 아랫도리부터 스멀스멀 떨려오는 간지러움을 참지 못해 연은 오줌을 싸고 돌아서는 남자처럼 온몸을 조심 흔들었다. 그깟 눈썹이야 없어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이상하게도 생각이 더 이어지지 않았다. 왜 일까? 곰곰 생각하다가 연은 그것이 머리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숱이 많지 않은 머리를 연은 언제나 모자로 숨기며 다녔다. 빨간이 이번에는 연의 앞머리 대신에 모자를 넘겼다. 훤히 드러난 이마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빨간이 다른 여자들처럼 연을 노려보다가는 어디론가 달아날 터였다. 너, 대머리였어? 그런 한 마디를, 어쩌면 내뱉을 지도 몰랐다. 오래 전에 이마와 얼굴이 같은 크기로 변해버렸다. 그게 다 잘난 일꾼 아버지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연의 손에 숟가락 보다 삽을 먼저 쥐어주었다. 

 이걸 먼저 잡아야지 밥 굶을 일이 없는거드메.

 워낙 산골이었고 또래 친구들이 모두 집안 허드렛일을 도와서 연은 그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며 자랐다. 

 이 어깨가 없으면요, 용형, 우린 일을 안 해도 되지 않겠어요? 난, 정말, 이 어깨를 뽑아버리고 싶었드래요.

 술잔을 내려놓은 연이 자신의 어깨를 두 손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아버지는 소 한 마리만 생기면 더 이상 일을 시키지 않겠노라며 연의 어깨에 비잡이를 걸고는 했다. 좁은 비탈길에 소 한 마리 되어 연은 우줄우줄 하루 종일 쟁기질을 했다. 친구들이 하나둘 대처로 배움을 떠나고 스스로도 무엇인가가 되고 싶다는 꿈이 생길 때쯤 연은 왜 그렇게 일만 죽어라 해야 하는지가 비로소 궁금했다. 쟁기를 끌고 지게를 지고 꼴을 나르고, 모두 어깨가 하는 일이었다. 일이 하길 싫을 때마다 연은 욱신거리는 어깨를 뽑아버리고 싶었다. 떡진 머리에 땀이 스몄다. 일에 지쳐 머리를 감지 못하고 잠든 날들이 많아졌다. 숱 많던 머리칼이 햇볕과 땀에 비루먹어 듬성듬성 빠질 때쯤 소가 생겼다. 일은 멈추지 않았다. 

 아부지, 나 인제 일 안 해요. 문학을 할 거란 말예요.

 문학, 그게 뭐에니? 소 보다 귀한 거니, 씨앗처럼 예쁘거니?

 옥수수 씨앗을 심다 말고 아버지는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니가 만날 헛 생각만 하므 코앞만 보고 먼 산을 못 보니까 쟁기질이 이리 삐뚤 저리 끼우뚱거리는 거 아님, 쯧쯧. 

 강릉에 있는 대학에 원서를 넣고 돌아왔다는 말에 아버지는 담뱃불을 거푸 빨아들였다. 거 대학에는 어찌 돈을 대누? 일 없으니 그냥 한 해만 더 열심히 하믄 내 대학 보내줄거마. 아버지는 말했지만 한 해가 지나고 다시 한 해가 지나도 돈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에이 씨, 자꾸 그러믄 내 이 소 팔아 버릴거에요. 진짜래요, 거짓말 아니에요! 

 협박을 해도 아버지는 콧방귀를 뀌며 온갖 달콤한 말로 연을 달래놓았다. 연이 더 참지 못해 작은 트럭에 소를 싣고 달아나던 밤, 멀리서 소도둑을 외치는 아버지의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소 기침을 뱉던 아버지의 것이라고는 도무지 믿기 힘든 목소리였다. 덜컹거리는 자동차 소리에 묻혀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고 연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그 봄, 연은 소를 닮은 아버지의 눈이 떠올라 우시장에 가보지도 못하고 소와 함께 꽃 아래를 떠돌았다. 그걸 소설이라고 썼더니 어느 새 영화가 되어 돌아왔다. 맙소사, <소와 함께 여행하는 법>이라나. 남자 주인공처럼 숱 많고 찰랑거리는 머리를 가졌다면 공효진처럼 예쁜 여자가 바람피운 연을 나무라며 나쁜 새끼, 니가 날 두고 딴 년을 만나, 나쁜 새끼, 씨발 새끼, 욕을 하며 눈썹을 밀었을려나. 장가를 들어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딸년 하나 얻었을려나. 그랬다면 연도 아버지처럼 일만 죽어라 매달렸겠지. 

 돌아온 아들을 보고 아버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트럭에 실렸던 소를 보며 우엉우엉 울음을 흘렸던가? 그 해가 가기 전에 아버지는 연 앞에 누런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한 동안 소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사람은 어차피 일을 위해 만들어진 존재들이라는 걸 대학에 들어가서 알게 되었다. 태초에 오직 신들만이 이 세계에 존재했을 때 고급 신들을 위해서 일만 하던 하급 신들이 있었다. 해도 해도 또 하고 또 해도 하급 신들의 일은 끊이지 않았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모두 몰살당했다. 하급 신들의 우두머리였던 웨일라는 온몸이 수 만 조각으로 찢기는 형벌을 받았다. 웨일라의 조각난 살과 피에 흙을 섞어 신들은 일꾼을 만들었다. 사람이었다. 그러니 사람은 모두 일꾼으로 일 수밖에 없었다. 

 사람으로 태어나 일하지 않고 사람을 부리기만 하는 이들은 신일까, 사람일까? 소를 부리지 않고 소를 먹기만 하는 존재들은 사람일까, 신일까? 연은 태초의 신화라는 길가메쉬 서사시를 떠올리며 생각했다. 그나마 소를 부릴 수 있다는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이었을까? 소를 닮은 눈을 하고 우엉우엉 눈물을 흘리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연이 소설가라는 이름을 얻고도 고향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아버지의 눈빛 때문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삽 들고 논두렁에 나가야 마음이 편해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렇게 살아간다면 평생 제대로 된 글 하나 쓰지 못하고 늙어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솟아나곤 했다. 아버지를 피해 도망치듯 연희에 찾아든 것도 그런 무서움 때문이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연은 숱 없는 머리가 고마웠다. 빨간 속옷이 눈썹을 밀어주지 않는 것이, 눈썹을 밀며 욕을 해주지 않는 것이 고마웠다. 아직 장가들지 못한 스스로가 참 많이도 고마웠다.  

 니그럴, 그니까 말야 성형. 성형의 눈썹은 말에요, 그 빨간 팬티가 그랬다 이 말에요. 

 연은 다짐하듯 말을 욱대기며 쩝쩝 입맛을 다셨다. 몇 잔 술이 알싸하게 연을 달래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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