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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에덴 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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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헌용 Nov 18. 2022

꼴랑

4

나와 보니 좋기는 좋은데 자꾸만 이런저런 일들이 여자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 밭일이며 집안일이며 할 일이 태산 같았다. 저러다 또 언제 아프다고 나뒹굴지 무엇보다 그게 가장 큰 걱정이었다. 여자는 주머니 속에 넣어둔 사탕 약을 가만히 만져보았다. 약이 얼마나 독하면 그리 울부짖던 사람이 눈을 까뒤집은 채 아픔도 잊고 지쳐 잠이 들까, 손수레를 끄는 남자의 몸이 점점 작아지는 것만 같았다. 생각들을 떨치려 여자는 다시 노래를 불렀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비린내 나는 부둣가에 이슬 맺힌 백일홍 그대와 둘이서. 남자가 갑자기 손수레를 멈추고 돌아보서 여자에게 소리쳤다. 오매, 그려이, 이거네이. 이 노래. 자네가 처음 불렀던 게 이 노래 아닌가벼. 말을 마치고 남자가 노래를 거둔다. 그대와 둘이서, 한껏 목을 뽑는데 그러나 노래가 재미 있지가 않았다. 여자의 목소리가 점점 줄어들었다. 그대와 둘이서, 그러나 어느 사이 어설픈 남자의 목소리만 남았다. 희망에 울던 항구를 웃으며 돌아가련다 물새야 울어라. 그러나 항구는 닫히고 물새마저 떠나버린지 오래였다. 저 멀리 멀어진 물길처럼 남자도 이제 떠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여자는 붉어진 눈시울을 떨구며 남자를 불렀다. 

 여보, 힘 안드요?

 헉헉거리는 소리를 감추며 남자는 부러 큰 소리로 말을 받았다. 

 암만, 나가 아직은 그래도 강호동이여. 근디 힘은 무슨, 이깟거에.

 근디 어디 갈라고 그라요? 참말로 지리산에라도 갈라요. 인자 돌아갑시다. 당신 힘드요이.

 다 왔네, 거기 안 불편한가, 조그만 더 참으소이. 

 비틀비틀 언덕을 오르던 손수레가 기어이 멈춰섰다. 헉헉거리며 숨을 고르던 남자가 풀썩 주저앉았다. 또 무슨 사단이 난 것은 아닐까 여자가 손수레에서 벌떡 뛰어내려 남자에게 달려갔다. 여자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남자가 오른 손을 들어 흔들었다. 괜찮다는 뜻이려니, 여자는 그러나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당신 괜찮소? 

 조심스레 묻는 말에 남자는 대답이 없다. 헉헉거리는 숨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당신 참말로 괜찮소, 여자의 목소리가 젖어들었다. 남자는 그제야 잔뜩 찡그린 얼굴을 들어 애써 웃어보였다. 

 괜찮네, 이 사람아. 나, 막걸리나 한 잔 주소.

 아따 이 마당에 술은. 인자 갑시다. 여기 타시오, 예.

 다 왔당게 그러네. 저 보소 저기만 넘어가면 꽃이 가득할 것인게이. 

 막걸리 한 잔 털어넣고 남자는 다시 손수레를 끌었다. 돌아가자는 여자의 말에 남자는 말 못하는 일소처럼 비틀비틀 손수레를 끌었다. 

 인네시오, 이. 

 여자도 더 어쩌지 못하고 손수레만 뺏으려 들었다. 주라거니 만다커니 한 바탕 소동을 피운 뒤 여자가 남자를 태우고 우줄우줄 언덕을 올랐다. 그 사이 남자가 손수레 뒤 칸에 앉아 막걸리를 홀짝거렸다. 마침내 언덕을 돌아 산모퉁이를 넘어서는 길에 꽃을 만났다. 연분홍 수국이 산 가득 피어 바람에 흔들렸다. 여자는 손수레를 멈추고 그대로 서서 꽃들을 마냥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었다. 바람 속에서 여자도 꽃 한 송이로 흔들렸다. 그대와 둘이서 꽃씨를 심던 그날도오오오, 남자의 못난 가락이 하늘로 이어졌다.      


 수국을 한 움큼 따오는 남자를 보며, 저 영감탱이가 무슨 무드다냐, 여자는 실없이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수국을 받은 것은 막걸리였다. 수국 여린 향이 막걸리에 스며 맛이 꽃으로 피웠다. 막걸리를 몇 잔 먹고 남자가 여자 무릎을 베고 누웠다. 

 우리가 산지가 벌써 사십 년이 넘었던가? 

 남자는 지난번에 물었던 물음을 다시 이었다. 

 그려 참 오래 살았네이. 근데, 이, 근데, 인자 당신 어디 가지 마소. 밭일도 말고 식당도 하지 말고.

 여자를 올려다보는 남자의 눈이 말똥말똥 빛났다.

 그믄 뭐 먹고 산다요?

 내 통장 있잖는가, 나가 아까 잠에서 깨는디 자네가 옆에 없은게 영 허전해서 안 되겠데. 자네가 옆에 없은게 나가 서운해서 안 되겠데. 

 그깟 이백만 원인가 삼백 만원 있는 그거 말이요, 그러나 말은 한숨이 되어 나왔다. 여자가 애써 먼 산을 바라보았다. 해가 뉘엿뉘엿 기울고 있었다.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드는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남자가 건네는 막걸리 몇 잔을 홀짝홀짝 받아먹어서 그런가 여자는 자꾸만 웃음이 나왔다. 노래를 하다 말고 하다 말고 여자는 피식피식 웃고 웃었다. 웃음 사이에 내려앉은 어둠이 깊었다. 노래 속에 묻힌 길은 먼데 전조등을 밝힌 차들은 경적을 울리며 빠르게도 스쳐 지났다. 

 모든 것이 저렇게 빨리 지나갔던가 흔적도 없이, 꽃잎이 지는 것처럼 소리도 없이.

 불빛 하나 없는 길 위에 홀로 버려진 느낌이었다. 흔들리는 손수레 위에서 코를 고는 남자가 있어 그마나 위안이 될까, 자네는 나한테 바라는 거 없는가? 묻는 남자의 말에, 연지 찍고 곤지 찍고 면사포도 쓰고 싶고요, 당신이랑 혼인신고 해서 우리 자식들 떳떳하게 해주고도 싶고요, 목구멍까지 차올랐던 말을 하지 않은 게 잘한 것인지 잘못한 것인지 여자는 알 수 없었다. 

 잠든 남자를 번쩍 안아 방안으로 옮기다가 여자는 우두망찰 그 자리에 서서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남자의 모습을 가만히 더듬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무게가 하냥 이 정도였소. 당신이 겨우 꽃 한 송이만이나 한다요. 여자는 남자를 꼭 끌어안고 다시 손수레로 발길을 돌렸다. 나가 이 벤츠 다 만들면 이, 자네 태우고 꽃구경도 가고이, 글고 나가 이 벤츠로, 이. 남자가 숨겨놓고 들려주지 않았던 말들이 여자에게 술술 날아들었다. 여자는 손수레를 끌고 양귀비 꽃 우거진 밭에 나갔다. 꽃잎에 떨어지던 달이 서둘러 자리를 비켜주었다. 양귀비 꽃망울 몇 개 따들고 여자는 우줄우줄 마른 갯벌로 손수레를 몰았다. 소가 벌떡 일어나고는 했구만이. 남자는 말했지만 소를 벌떡 서게 하는 것은 잎이 아니라 꽃망울이었다. 남자를 따라 밤봇짐을 쌓지 않았다면 여자는 아버지가 점지해준 이웃 마을 총각과 오순도순 재미졌을까. 아버지가 내어준 소 한 마리 몰고 여름이면 소들에게 양귀비를 먹였을까. 아버지는 여름이 되면 커다란 수소를 골라 양귀비 꽃망울을 먹이곤 했다. 안 그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끔벅거리며 수소가 갑자기 암소 등에 올라탔다. 암소는 놀라 도망을 가고 수소는 껑충껑충 뒷발로만 잘도 쫓았다.     


 별들이 갑자기 여자를 향해 한 발 두 발 다가오기 시작했다. 계집이 아프다고 소리치던 곳을 더 지나 아직은 물컹한 느낌이 남은 갯벌 구석에 손수레를 멈췄을 때 별들이 우수수 쏟아졌다. 

 기억나요? 여가 우리 막내 만든 곳 아니요이. 그때 우리 배가 고장 나서 오도가도 못하고 여기서 몇 시간을 보냈지라. 그때 당신이 내 배를 더듬음시롱, 여자가 손수레로 들어가 술 취해 잠들어 있는 남자의 배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고생이 많다고 고생이 많다고 안 했소이. 힘든 일 시켜서 미안하담서, 근디 당신도 참 얄궂어라, 몸은 천근만근인디, 미안하담서 그 시간을 못 참고 당신이 나를 안 놀렸소. 파도는 치고 무서워 죽겠는데, 무서워 죽겠는데 말요, 이. 갑자기 파도가 몰아쳤다. 남자가 파도 속에서 닻을 내렸다. 온몸에 물이 흥건하다. 여자는 남자를 난로 곁으로 이끈다. 

 우리 영민이 볼, 수 있는거죠?

 그게 무슨 소리야. 이깟 거에. 힘들지, 당신한테 이런 일 시켜서 미안해. 

 남자가 떨고 있는 여자를 꼭 껴안다가는 가슴에 손을 집어넣는다. 남자의 아랫도리가 벌떡 일어선다. 젖은 몸을 하고 남자는 여자의 입술을 찾는다. 

 나, 무서워요. 왜 그래, 진짜. 장난 그만해요. 

 장난은 무슨 장난이여. 얼른 일루와봐봐, 응.

 몇 번이나 남자의 손길을 마다하던 여자가 마침내 남자에게 몸을 맡겼다. 남자의 뿌리가 여자의 꽃 속에 파묻혔다. 파도가 배를 흔들 때마다 남자와 여자가 하나로 흔들렸다. 파도의 크기를 따라서 두 사람의 신음 소리도 달라지곤 했다. 파도를 무서워하던 여자는 그러나 어느 사이 거센 파도가 몰아치기를 바랐다. 절구질을 하지 않아도, 요분질을 하지 않아도, 남자와 여자는 파도 속에서 거칠게 엉커들었다. 위태위태 흔들리는 파도 속에서 남자와 여자는 가만히 있어도 좋았다. 철썩 아아, 철썩 아아, 철푸덕 아파요, 철푸덕 아파요, 뱃머리를 때리는 파도 소리 따라 여자의 신음이 이어졌다. 여자의 신음이 파도를 뚫고 하늘에 닿았다가 별이 되어 우우 떨어졌다.   

 여자를 가만히 껴안고 남자가 벌써 몇 번째 말을 매지 놓지 못하고 꼬리를 흘렸다. 

 아, 왜 그래요. 말을 해야 알죠. 

 아니라니까, 아니여. 

 망설이던 남자가 쩝쩝 입맛을 다시더니 기어이 말을 풀어놓았다. 

 파도처럼 거칠게 여자가 도리머리를 흔들었다. 

 그게 뭐라고요, 이. 그깟게 뭐라고 그렇게 싫다고 싫다고 당신 애를 태웠을까. 이만큼 살아봉게 내가 당신이고 당신이 난디, 그때 왜 몰랐을까요. 내 몸 어디면 어떻고, 당신 몸 어디면 어떻다고요, 이. 이 늙은 몸뚱이 하나 꼴랑 남기려고 그렇게 당신 애를 태웠을까요, 이. 

 여자가 남자의 무릎춤까지 바지를 내리고 아랫도리를 핥기 시작했다. 여자는 어느 새 옷을 모두 벗어던졌다. 조심 핥다가 살짝 깨물었다가 쪽쪽 빨기도 했다. 여자가 움직일 때마다 손수레가 앞으로 기울었다가 뒤로 기울었다. 도무지 일어서지 않을 것 같은 늙은 뿌리가 아주 조금 움직였다. 

 차 한 대가 마른 갯벌에 스르르 다가서더니 손수레 위에서 알몸으로 흔들리는 여자를 보고 서둘러 멀어진다. 올 때는 켜지 않았던 전조등 불빛이 버려진 마을을 핥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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