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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에덴 15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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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헌용 Nov 21. 2022

연희

2

 눈썹이 검은 테를 두르고 자리를 잡았다. 눈썹처럼 사라졌던 달이 다시 차오른 것도 오래전이었다. 그런데도 다시 또 그 이야기이다. 눈썹을 만지며 이ㅎ성은 한숨을 내뱉었다. 도무지 언제까지 계속 될 것인지, 이놈의 글쟁이들과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다고 성은 생각했다. 오늘 만 해도 그렇다. 조그마한 텃밭 하나 갈아보자고 모여서 한다는 것이 대낮부터 술질이었다. 술을 마시는 거야 나무랄 일이 아니었지만 몇 잔 술에 얼굴이 불콰하게 달아올라 한다는 것이 또 눈썹 타령이다. 

 오래 머무르지 않는 곳에서 소문은 더 많이 생기고 더 많이 떠돌았다. 

 연이 처음 빨간 속옷이라고 했을 때 성은 그게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연희에 찾아온 몇 안 되는 사람들 가운데 짧은 치마는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한참을 이야기하고 나서야 성은 보름쯤 전 술자리에 찾아온 후배를 생각해냈다. 연희에서 일하던 직원 하나가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긴다고 했다. 촌장까지 찾아와 벌인 송별 술자리에 후배 하나가 찾아오긴 했었다. 연은 후배를 보며 믿~어도 될까요, 당신이 하신 마알씀, 사랑한다는 그 마알을, 제가 믿어도 될까요, 임희숙의 노래를 부르기도 했었다. 긴 생머리를 하고 작고 예쁘장한 얼굴, 연극판에서 제법 주가를 올리는 후배였다. 후배는 그러나 짧은 치마가 아닌 진한 청바지를 입고 나타났다. 짧은 치마는 외려 그만 둔 직원이 입고 있었다. 그녀의 속옷이 빨간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혹여 두 사람의 이미지가 연에게 합쳐 나타난 것은 아닐까 성은 생각해보았다. 때때로, 아니 자주 사람들의 기억은 제멋대로 망가지고 일그러진다. 성은 요즘 그걸 너무도 자주 느끼고 있다. 그러니까 연이 용을 바라보며 어깨를 끊어버리고 싶다고 했던 것이 텃밭을 갈던 아침이거나 혹은 아주 오래 전 일처럼만 여겨졌다. 밥을 먹고 돌아서면 배가 고파왔고 잠을 자다 깨어보면 전혀 낯선 곳에 머무르기 일쑤였다. 어느 사이 세계는 그렇게 알 수 없는 방향으로 굴러가고 있었다. 어쩌면 그것은 세계가 아닌 연희가 가지고 있는 힘인지도 몰랐다. 연희에 귀신이 나온다는 이야기는 그래서 생겼을 터였다. 성이 들어오기 한참 전부터 연희에 들어와 작업을 하는 후배 작가 몇이 귀신을 봤노라고 했다. 가위를 눌리는 일이 다반사였고 이층 창문 밖에 서성거리는 그림자가 많다고 했다. 

 연희에서는 눈썹이 사라진 것도 어쩌면 너무 당연한 일이지 몰랐다. 

 아참, 아니래도 그러네. 그냥 미스터리라니까. 아니 그 후배가 내 눈썹을 밀 이유가 전혀 없다니까요. 그리고 나는 잘 때 문을 잠그고 자니까 사람은 절대 들어올 수 없다니까. 그냥, 이건 수수께끼예요. 초현실이라니까. 초현실.

 달리 생각도 도리가 없었다. 성은 다른 날처럼, 아니 더 가뿐한 마음으로 일어나 세면대 앞에 섰다. 면도를 하고 세수를 하고 스킨과 로션을 발랐다. 무언가 조금 다른 분위기였다. 이상한 기분에 거울을 한참 동안이나 들여다보고 서야 간밤에 눈썹이 모두 사라졌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귀신을 보았을 때보다 더욱 더 놀란 마음이었다. 

 지난 밤 술자리를 떠올렸다. 술이 적지 않았지만 눈썹이 사라지는 것을 모를 만큼 많지도 않았다. 배우에서 극작가로 변신해 쓴 몇 편의 희곡이 제법 좋은 성과를 거뒀다. 성은 뒤이어 다른 희곡 하나를 써나갔다. 진흙빵을 구워먹는 아이들을 티브이에서 보고나서였다. 한쪽에서는 살을 빼기 위해 러닝머신에 오르고 다른 한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흙을 구워먹어야 하는 세상 속에서 성은 살고 있었다.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일하기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연은 말 하지만 성은 알 수 없었다. 도무지 누가 신이고 누가 사람이란 말인가? 해석이 불가능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한 것은 성이 새로운 희곡을 쓰면서부터였다. 무슨 복인지 <살>이란 제목의 희곡이 창작팩토리 대본공모에 선정되었다. 극을 준비하면서 성에게 찾아들었던 미스터리는 사라졌다. 다시 그 알 수 없는 그림자가 달려들기 시작한 것은 연희에 들어오면서부터였다. 소나무 숲을 걷다보면 어느 새 남대문 시장 한 가운데서 물건 파는 노파들과 노닥거리고 있었다. 주머니에는 동전 하나 들어 있지 않았다. 그럴 때마다 몇몇 후배들에게 전화를 걸어 차비를 꾸어오곤 했다. 희곡을 써보겠다고 컴퓨터를 열면 도무지 기억에 없는 글자들이 화면에 가득했다. 진흙빵을 씹어 먹은 것 마냥 목안이 컬컬하게 잠겨왔다. 눈썹이 사라진 것도 그저 그런 미스터리의 하나로 생각하기로 마음 먹었다. 누가 몰래 방에 든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누군가 눈썹을 밀었다면 눈썹 몇 올은 주위에 흩어져 있어야 했다. 방은 오히려 다른 날보다 한결 더 깨끗했다. 사람들은 믿지 않을 터였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눈썹이 없어졌다. 누가 그 말을 믿어줄 것인가? 성은 옷장을 뒤졌다. 모자가 보이지 않았다. 가까운 시장으로 가는 길이 멀기만 했다. 한동안 성은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다녀야만 했다.  

 근데 말이야, 연형. 진짜 누가 형 눈썹을 밀어주면 좋겠어요? 내가 후배 불러줄까, 짧은 치마 입고 오라고.

 에이, 농담이래요. 나, 그럼 진짜 장가 못가요. 그나마 머리도 없는데, 흐, 흐흐····· 하긴 장가도 못가고 이러고 있으니 소설이나 쓰지 안 그럼 논지렁이 밖에 천상 더해요. 

 성이 한 손을 들어 이제 막 자리를 잡아가는 눈썹을 쓰다듬었다. 까칠까칠 참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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