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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에덴 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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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헌용 Nov 21. 2022

연희

4

 또, 또 나야. 나 아냐, 아니라니까. 내가 왜? 내가 성 눈썹을 왜 밀어? 

 이ㅁ랑은 날아든 화살에 놀란 토끼처럼 눈을 커다랗게 뜨며 손사래를 흔들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도 아니고 아닌 밤중에 눈썹이었다. 어느 날 밤 눈썹이 사라진 남자가 모자를 푹 눌러쓰며 연희를 오갔다. 그걸 처음 본 사람이 랑이기는 했다. 어, 성, 얼굴이 왜 그래? 랑이 물었을 때는 성의 눈썹이 듬성듬성 솟아오른 뒤였다. 랑은 최초의 목격자라는 까닭으로 때때로 범인으로 지목 받았다. 뜬금없었지만 이상하게 재미있기는 했다. 

 나였다면 말이야, 눈썹만 밀지 않아. 머리 한 가운데 고속도로도 몇 줄 남겨두지. 히히. 

 설픈 웃음을 흘리며 랑은 성을 바라보았다. 도무지 저 남자는 어디서 눈썹을 흘리고 다니는 것일까? 어쩌면 내기를 했을 지도 몰랐다. 이제 막 모집된 배우 가운데 예쁘장한 계집아이 하나 있었겠지. 야, 재, 이쁘지 않냐, 내가 꼬신다. 누군가 먼저 그렇게 말했겠지. 이어서 아니야 쟤 내가 먼저 찜했다, 누군가 말을 이었겠지. 한때 잘나가던 배우이며 지금은 전도유망한 극작가 성이 가만있을 수가 있나. 어어, 왜들 이래. 쟤 내꺼야. 그렇게 시작된 말장난이 다른 스텝들과의 내기가 되었다. 

 넘어올 듯 말 듯 계집아이는 속만 썩였다. 연습을 하고 공연을 하는 동안 계집아이는 작은 새처럼 포롱포롱 세 사람 사이를 날아다니며 귀여운 웃음을 흘렸다. 하루 이틀 사흘나흘, 장난처럼 시작한 사랑이 깊어졌다. 마지막 공연이 끝났을 때 계집아이는 셋 모두를 두고 훌쩍 떠났다. 승자는 없었다. 

 그러니까 세 사람이 모두 패배를 시인하고 술을 사기 시작했다 이거지. 일차를 누가 사고 이차를 누가 사고 삼차를 누가 사고. 그런데 아무도 진짜 벌칙을 시행하지 않는 거지. 술자리를 끝내고 돌아오는 길에 성은 그게 또 억울해지는 거야. 아, 난 사랑을 한 게 아니었구나. 그냥 꿈을 꾸는 거였구나. 그러면서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면도기를 들고 가까운 화장실에 가서 쓱쓱. 그렇게 혼자 벌칙을 실행하는 거지. 그러니 방안에 흔적이 남을 턱이 없지. 히히. 근데, 이거 제법 재밌다. 나 소설로 쓸래, 소설로 써도 돼? 

 성이 고개를 끄덕거리자 랑은 다시 히히 설픈 웃음을 토했다. 소설을 생각하며 이렇게 행복했던 적이 언제였던가 랑은 기억나지 않았다. 시를 쓰다가 소설을 처음 썼을 때 랑은 좋았다. 수만 가지 종류의 사탕이 줄줄이 늘어서 있는 예쁜 사탕가게에 들어선 기분이었다. 언제라도 손만 뻗으면 그 사탕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햇살 아래 사탕을 빨아 먹으며 재미난 동화책을 읽는 기분이었다. 남들에게 남루해 보이는 엄마의 식당 이야기를 솔직하게 그리고 재미있게 썼다. 『삼오식당』. 그곳을 드나드는 수많은 사람들과 랑은 반갑게 인사를 나눴다. 랑에게 소설은 그렇게 왔다. 비참하고 슬픈 것이 아니라 기쁘고 행복한 것이었다. 

 어느 순간 랑은 기쁘게 글을 쓴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렸다. 글을 쓰기 위해 아픔을 찾아야 했고, 글에 쫓겨 행복을 잊어버려야 했다. 대여섯 해 사이에는 그게 더욱 더 심했다. 엄마가 언니의 보증으로 가게를 말아먹고 좁디좁은 랑의 집에 들어와 더부살았다. 남편의 눈치가 심했지만 모른 척 소설을 썼다. 아이들을 재우고 나서 랑은 글을 썼고, 아이들을 학교 보내고 글을 썼다. 소설이거나 청소년 소설이거나 동화이거나 잡지에 실을 심심풀이 산문이거나 가리지 않았다. 글을 써야만 엄마의 빚을 갚을 수 있었다. 글을 써야만 몰려드는 빚쟁이들에게 한두 푼 돈을 쥐어주며 큰소리를 칠 수 있었다. 글을 써야만 좁은 집에서 탈출 할 수 있었다. 몇 해 사이 서른 권이 넘는 책을, 그야말로 찍어냈다. 부끄러웠지만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기로 다짐했다. 부끄러울 까닭이 없었다. 부끄럽다면 오히려 글을 쓰지 않는 작가였다. 빠비용의 어느 장면처럼 인생을 소비하는 것이야말로 죄라면 죄였다. 그런데 왜, 이렇게 마음이 헛헛할까. 엄마의 빚을 갚고 그토록 소원하던 큰집으로 이사를 했다. 부러울 게 없었다. 

 그런데 왜? 

 부러 히히거리며 웃었지만 랑의 마음은 꺾인 가지처럼 스산스러웠다. 연희에 들어오면 좀 나아지려나, 그러나 외려 눈두덩이처럼 더 커지기만 했다. 밤이 늦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새벽이 와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입고 있던 하얀 운동복을 입고 새벽 안개가 내려앉은 솔숲을 거닐다가 아무도 받지 않는 전화를 걸고는 했다. 신호대기음 사이로 랑은 혼자 주저리주리 이저런 말들을 토해놓았다. 그래도 마음을 어지러우면 사동 지하에 있는 작가쉼터 깊은 어둠 속으로 스미곤 했다. 불을 커지 않은 채 러닝머신 위에 서서 한참을 달리면 돌개바람 같던 마음이 겨우 가라앉고는 했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혼자 탁구공을 튕기면 깔깔깔 웃음이 나왔다. 

 연재를 끊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석 달, 랑은 웃고 떠들고 술 마시고 놀기로 했다. 술이 떨어지면 아무 때고 가까운 작가들에게 어디냐, 술 있냐? 문자로 물어보는 것이 재미있었다. 또냐? 대답을 하고 작가들은 와서 가져가라는 등, 안 그래도 술이 마시고 싶었다는 등, 지금 이동에서 술판을 벌이고 있다는 등 대답을 해왔다. 그들에게 다가가 히히 웃으며 못난 이야기를 털어놓고 싶었다. 랑은 그러나 오늘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어느 날 갑자기 빠져버렸다는 성의 눈썹처럼 마음 속 찌꺼기가 사라져버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술 잔 속에 담긴 달 하나를 랑은 가만히 들어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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