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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번째 스위스 여행 (봄)

비 내리는 오월의 여행

몇 년 전, 처음으로 혼자 떠난 여행지가 스위스.


비행기 창문 너머로 내려다본 오월의 스위스는
초록빛이 짙고, 공기까지도 맑아 보였다.


카펠교를 보기 위해 들른 루체른.
짐가방을 코인 스토리지에 넣고
올록볼록한 돌길을 따라 아기자기한 시내를 걸었다.
날이 흐리고 비가 내림에도 고즈넉하고 분위기 있는 루체른을

사진에 담을 수 없음이 안타까웠다.


보슬비가 내리는 루체른을 짧게 둘러보고
기차 안에서 먹으려고 바삭한 바게트로 만든

베트남 반미를 샀다.
역 근처 Coop 마켓에서는 딸기와 작은 와인,
맛있어 보이는 올리브를 사서 기차를 타고
숙소가 있는 호수 마을 룽겐(Lungern)으로 향했다.


구글지도를 보고 예약한 호텔은
룽겐 기차역 바로 앞 Emma’s Hotel.

오후 다섯 시쯤 도착해 역에 내리니
눈앞에 에메랄드빛 호수와 폭포가 그림처럼 펼쳐졌다.


풍경에 대한 감탄도 잠시,
나를 싣고 왔던 기차가 떠난 뒤의 적막감은
풍경이 주었던 감탄을 단숨에 삼켜 버렸다.

룽겐 마을 기차역에서 바라본 풍경

호텔로 들어가니 무인 체크인 시스템,
사람은 없고 기계는 독일어로 되어있고 안은 어둑어둑했다.

어찌어찌해서 기계에서 방 열쇠를 받고 방으로 올라갔다.

다행히 객실은 현대식으로 잘 꾸며져 있었고
넓고 깨끗해 안도감이 들었다.

오후 다섯 시였지만 아직 밝은 마을.
작은 마을을 둘러보려 잠시 산책을 나서는데
노란 고양이 한 마리가 다가와 내 발아래 냅다 드러누웠다.

지금 같으면 반가워 얼른 쓰다듬었겠지만,
고양이를 잘 몰랐던 그때는
‘어디 가려운가?, 혹시 벼룩이라도 있는 건 아닐까,’
생각하며 망설이는 사이,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바로 일어나 쏜살같이 가버렸다.

스위스 시골 마을에서 있었던
나와 고양이 종족의 소심했던 첫 만남이었다.

마을 산책 중 만난 예쁘게 꾸며진 스위스 가정집 정원.
룽겐마을 Emma's Hotel에서 간단한 저녁.

다음날 아침, 식당으로 내려가니
다들 어디서 왔을까 싶게 여러 사람들이 모여
도란도란 아침을 먹고 있었다.
이렇게 조용하게 있으니 내가 사람들이 있는 줄도 몰랐나 보다.


룽겐 역에서 한 시간에 한 대 있는 기차를 타고

인터라켄에 도착했다.
기차문이 열리면서 쏟아지는 플랫폼을 가득 메운 여행객과

바쁘게 달려가는 캐리어 바퀴소리가

이곳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꿈꾸는 여행지인지를 말해주는 듯했다.


배를 타고 ‘사랑의 불시착’ 피아노 장면으로 유명한 이젤발트,
그림처럼 아름다운 브리엔츠 마을에도 들렀다.
흐린 날씨였지만 하더쿨룸 전망대에 올라
잠시나마 구름 사이로 얼굴을 내민 두 개의 호수들을 만날 수도 있었다.

사랑의 불시착 피아노 장면으로 유명한 이젤발트 선착장.

별 기대 없이 찾았던 베른에서
구시가지를 걷다 만난 에메랄드빛 아레강과
붉은 지붕의 집들이 만들어낸 풍경은
마치 내가 안데르센 동화 속 한 장면에 있는듯한 기분을 들게 했다.

베른에서 만난 아름다운 풍경

여행 넷째 날,
스위스에 여름 학기 교환학생으로 와 있던 큰딸이 합류했다.


체르마트로 향하는 기차는
아찔한 산비탈을 아슬아슬하게 오르며 달렸다.
일반 차량이 들어올 수 없는 청정 마을,
호텔에서 보내준 전기차를 타고
기차역에서 5분 거리의 숙소에 도착했다.


날씨는 여전히 흐리고 간간히 눈발까지 날리는지라
마테호른 뷰 객실임에도 창밖에는 하얀 구름만 보였다.


아무래도 오월의 스위스는 날씨가 영 도와줄 생각이 없는 것 같다.


마을에는 눈 같은 비가 흩날리고 있었지만
산악열차를 타고 리펠베르그 까지만 가보기로 했다.

운 좋게도 우리가 도착하자 구름이 걷히며
아주 잠깐, 마테호른이 모습을 드러냈다.

바로 앞에 우뚝 선 마테호른은 몇 분 간격으로
구름뒤로 숨었다 나왔다를 반복하며
보여줄 듯 말 듯 장난스럽게 실랑이를 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숨바꼭질도 잠시,

이내 몰려온 먹구름과 눈보라에 급히 서둘러 하산 열차를 타야 했다.

구름에 둘러싸인 마테호른.
잠깐 동안 파란 하늘, 사진 찍고 10분 뒤 눈에 쫓겨 내려와야 했다.

체르마트에서 묵은 부티크 호텔 줄른(Hotel Julen)은
고급 호텔 못지않게 깔끔했고, 스파 시설도 훌륭했다.

까만 얼굴의 스위스 양을 마스코트 삼아
스위스 전통 농장 테마로 꾸며놓아
마치 고급스러운 샬레에 대접받으며 머무는 듯,
편안하면서도 특별한 분위기를 주었다.


하프보드로 예약한 5코스 저녁은
신선한 재료와 정성스러운 조리 덕에
스위스 음식은 맛없다는 편견을 단번에 날려버렸다.


마지막 여정은 스위스 북쪽, 독일과 국경을 마주한 도시 바젤.
인터라켄이나 취리히와는 사뭇 다른
다소 삭막한 기차역 분위기에 잠시 경계심이 들었지만
시내를 걷다 보니 또 다른 매력이 보였다.

오래간만에 만난 맑은 하늘,
휴일이어서 한적했던 거리 풍경,
세월이 느껴지는 고풍스러운 성당 앞 광장에서
비눗방울 놀이를 즐기는 아이들까지…

그 여유로움과 고즈넉함 또한 나의 가슴 한편에 담겼다.

아이들 비눗방울 놀이가 한창인 여유로운 휴일 오후 바젤 대 성당 광장

융프라우를 보지 못한 아쉬움,

변덕스러운 날씨에 대한 서운함…


그렇게 아쉬움과 여운을 남긴 채

끝나가는 듯했던 나의 첫 스위스 여행.

하지만 취리히 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문득 ‘다음에 또 오면 되지’ 하는 생각에 이르니

아쉬움은 어느새 새로운 설렘으로 바뀌어 있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후에도
나는 한동안 스위스 날씨 앱을 지우지 않았다.
언젠가 다시 그곳에 갈 것임을,
다음번에는 꼭 맑게 갠 스위스의 진짜 얼굴을
만나고야 말리라 생각했다.

완벽하지 않았기에 더 소중했던
나의 첫 스위스 여행은
이렇게 나를 두 번째 스위스 여행으로 데려다주었다.

두 번째 스위스 여행에서 만난 맑은 날의 스피츠 마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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