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 갱 Dec 18. 2020

오키나와에서 백수로 산다는 것

갱의 일상

 "혼자서 평소에 뭐 해?"

 주위에 모두 일 하는 친구들뿐이니, 정말 자주 듣는 질문이다. 나 역시 수년간의 병원 생활을 하는 동안 늘 휴가에 목마른 직장인이었다. 막연하게 수련이 끝나면 좀 쉬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지언정, 정말로 모든 걸 그만둘 각오가 있지는 않았다. 그런 내가 결혼과 동시에 갑작스럽게 오키나와로 떠나며 타의적, 자의적 백수가 된 것이다.


 '일을 그만두면 잠깐은 좋겠지, 하지만 한 달 정도 지나면 금세 무료해지지 않을까?'

 막연한 걱정, 아니 일부분 주위에서 심어준 걱정 씨앗을 안고 백수 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1년을 지나고 보니, 신혼과 백수를 오키나와에서 보냈던 경험이 내 인생의 황금기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다. 그 시절 누군가에겐 다소 심심하고 밋밋할 수 있지만 행복했던 내 일상을 공유해보려 한다.

 

#아침

 일을 할 때에는 6시 전 기상해왔기 때문에 내가 아침형 인간이 된 줄 알았는데, 여기서는 8시가 넘어서야 날 깨우는 의 목소리에 겨우겨우 눈을 뜬다. 창문을 열면 건너편 어린이집에 한 둘씩 등원을 하기 시작하고, 이내 소리치며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소리가 새소리와 어우러져 난다.

“아이들은 팔다리랑 목소리가 연결되어있는 가봐. 소리를 안 지르면서 뛰지는 못하는 것 같아.”

놀리는 말투지만 사실 아이들을 좋아하는 오빠는 웃으며 창 밖을 바라본다.

 아침 식사는 간단하게 시리얼 또는 토스트다. 메뉴는 간단하지만 사실 배부르게 챙겨 먹고 집을 나선다.

# 의 출근길

 집에서 나와 세라노모리 공원(セ-ラ の森公園)을 지나 올라가는 길. 약간의 경사길을 오르는데도 우리의 작은 뿡뿡이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힘들다는 티를 온몸으로 낸다. 엑셀을 힘껏 밟아도 맘껏 나지 않는 속도에 머쓱해서 뒤따라오는 차를 보면, 노란 번호판을 단 경차들이 엇비슷한 속도로 따라 올라오고 있다. 오키나와 속도대로 모든 것이 움직이고 있어 답답해할 사람도 미안해할 사람도 없어진다.

 집에서 멀지 않은 벤또집은 출근하는 직장인들을 위해 아침에만 문을 연다. 제일 저렴하게는 100엔짜리 소바도 있고 300엔이면 적당하게 밥과 반찬이 나온다. 반찬은 대부분 튀긴 음식이라 건강에 좋지는 않아 보이지만 외면할 수 없는 이유는, 맛과 양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가끔은 부지런하게 내가 싼 도시락도 들려 보내지만, 도 은근 전문점의 도시락을 더 반기는 것 같다. 선심 쓰듯 제일 비싼 메뉴인 400엔짜리 도시락 계산하고 나와 또 달린다. 58번 국도를 달려 OIST 오르막 길까지 올라온 뒤에 과 400엔 도시락을 함께 내려주고 나면, 이제 혼자만의 시간이다.


#온나손 도서관 (온나손 문화정보센터)

 온나손의 바다가 보이는 도서관은 혼자 시간을 보내기 좋은 장소이다. 깔끔하게 정돈된 작은 도서관은 회원이 아니라도 들어갈 수 있다. 주제에 따라 잘 분류된 책을 보고 있으면, 여기도 한국의 도서관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해 안정감을 준다. 일본어 까막눈인 내가 가장 좋아하던 섹션은 잡지다. 그중에서도 ‘porte’라는 이름의 매거진은 오키나와의 잡지로 여행, 맛집, 카페 등의 정보를 담고 있다. 평소 잡지를 잘 읽지 않지만, 감성적인 사진과 함께 구석구석의 가볼만한 곳의 소개가 유용하기도 하고, 현지의 잡지를 읽는 스스로가 현지인이 된 것 같은 묘한 뿌듯함을 주기도 한다. 때로는 그림 동화책이나 무민 일러스트북을 꺼내어 놓고 앉아있으면 가만가만 시간이 간다.

도서관에서 사치스러운 뷰를 볼 수 있다.

 사실 이 도서관의 진짜 매력은 온전히 책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58번 국도 중에서도 르네상스호텔을 지나 북으로 달리는 길은 바다 그리고 야자수와 함께 달리는 길이다. 이미 타국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야자수가 주는 이국적인 느낌은 언제나 여행의 기분을 진하게, 내가 이 곳에 있음을 더 강렬하게 만들어준다. 이 이국적인 풍경을 가장 보기 좋은 곳이 바로 이 도서관 창가 자리이다. 아마 전 세계에서 경치를 앞다투어 자랑하는 도서관 중에서도 손에 꼽히지 않을까 싶다. “아, 시험 준비할 때 이런 풍경 보며 공부했으면 좋았을 텐데”. 책을 펴놓고 읽다가 고개를 들면 보이는 사치스런  풍경이 참 좋다.


# 바다, 언제나 바다

 햇살이 비치는 날에는 물론 해변이다. 가까이 혼자 가기 좋은 나비 비치, 잔파 비치, 토구치 비치는 내가 사랑해 마지않는 곳들이다. 모래사장은 아니지만 걷거나 자전거 타고 싶은 날에는 스나베도 좋다. 때로는 익숙한 곳을 떠나 때로는 새로운 해변을 찾는 것도 오키나와 백수가 해야 마땅한 일(?)이기도 하다. 혼자서 사람이 없는-때로는 지도상에 이름도 나오지 않는-숨은 해변을 찾아가서 있으면 자유로움과 더불어 그 나름의 고독함도 언뜻 비친다. 트렁크에 항상 실려있는 돗자리와 챙 넓은 모자, 그리고 책만 가져가면 끝이니 따로 준비할 것도 없다.

 나는 워낙 햇살 받으며 자는 것을 좋아해서 의도했든 아니든 곧잘 잠에 들곤 하는데, 주의할 점은 누워서 여유를 즐기는 사람과 노숙과는 한 끗 차이라는 것이다. 한 번은 잠이 너무 깊게 들어서, 찢어진 청바지 사이로 파고든 햇볕에 무릎이 다 타도록 2시간 넘게 숙면을  취한 적도 있다. 그 날은 혹시나 내가 노숙자로 보이진 않았을지 내 차림을 한 번 더 살펴보기도 했다. 햇빛에 반짝이는 잔잔한 바다를 바라보면 풍덩 들어가고 싶기도 하지만, 혼자서는 역시 흥이 나질 않아서 발만 살짝 담갔다가 다시 햇볕에 말린다.


# 일본어 그리고 영어 수업

 OIST는 이 전 글에도 나와있듯이 내가 아는 한(일반 기업에서 일해본 적은 없으나) 복지의 끝 보여준다. 학생뿐 아니라 교환학생, 심지어 교환학생의 와이프인 나에게도 영어와 일어 수업을 무료로 제공해준다. 일본어는 워낙 초급반이라 따라 읽기에 그치지만, 영어 교실에서는 하나의 주제에 대해 친구들과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는다. 학생 대부분은 일본 친구들이고, 중국, 우크라이나 친구들과 함께 한국인 대표로 내가 있다. 서로 문화적인 이야기도 나누다 보면 의외로 비슷한 부분이나, 생각보다 더 많은 차이점에 대해 서로 놀라기도 한다. (일본인들 특유의 “에에- 혼또?”를 듣는 것은 또 하나의 즐거움이다. 이 정도 되면 교육과정 중에 리액션 파트가 따로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본디 아니려고 해 봐도 어쩔 수 없는 모범생이기도 하고, 다른 바쁜 일이 없으니 과제를 열심히 준비한다. 그러다 보니 일주일 중 2,3일은 과 함께 출근해서 라운지에서 공부하다 수업에 가곤 했다. 이 정도면 뿌듯한 백수, 아니 학생 생활이다.


# 을 데리러 가는 길

 집에 있으면 오후 5시 반 즈음, 정겨운 피아노 소리가 동네에 울려 퍼지며 방송이 나온다. '미나 사마 곰방와'로 시작하는 동네방송이 들리면, 얼른 나가서 을 데리러 갈 시간이다. (일본 다른 곳도 그런지, 아니면 역시 여기가 시골이라 그런지 모르겠지만 동네 스피커 방송이 꽤 활성화되어있는 편이다.) 라디오로 미군방송 AFN(American Forces Network) 들으며 달리다 보면 어느새 OIST. 석양이 유난히 예쁜 날에는 수평선으로 넘어가는 해를 보고 있으면 타박타박 남편이 걸어 내려온다. 만나면 반가워 한아름 안아주고 오늘 저녁은 뭘 먹을지, 오늘 하루는 어떻게 보냈는지 이야기하다 보면 집으로 돌아가는 30분 운전이 잠시처럼 지난다. 이제 다시 둘의 시간이 시작이다.

OIST의 석양


 혼자 놀기도 오키나와에서는 더 즐겁다. 일상이라고 쓰긴 쑥스럽지만, 스탠드업 패들보드도 배우고 가라데 도장도 가보았다. 먹는 것을 좋아하는 만큼 종종 요리 연습은 물론 맛집 탐험도 빼놓지 않는다. 이 곳에서 다채로운 경험으로 쓰인 하루하루는 그동안 달리기 바빴던 나를 채우기 충분했다.


그래도 둘이 더 즐거운 신혼이니,

백수도 주말을 기다린다.

매거진의 이전글 250만원짜리 수입차와 오키나와를 달리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