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친구, 해남할머니(핫꽁치 튀김)

겨울을 베어 물어라!

by Gourmet

나에게 겨울은 바다와 학꽁치의 기억이다.


나는 외할머니와 친할머니를 해남할머니와 서울할머니로 부른다. 여전히 전화번호에도 그렇게 저장이 되어있다. 지역으로 따지면 끝과 끝에 살고 계시는 셈이다. 서울에 사는 동안 엄마가 학원일을 시작하며 학기 중에는 서울할머니께서 우리를 돌봐주시고, 일본 만화에서 방학의 배경이 늘 시골인 것처럼 여름과 겨울 방학 동안에는 땅끝 해남에 가서 머물렀다. 낚시를 좋아하시는 외할아버지 덕분에 해남에 가면 늘 바다에 갔다.

바다는 계절별로 즐길거리가 다양하다. 여름방학의 시작에는 입술이 파래지지 않을 적당한 온도로 데워져 첨벙 뛰어들 수 있다. 해남할머니집에서 굴러다니는 작은 김치통을 챙겨 이모에게 보낼 비단 조개껍데기를 수집하는 것도 큰 즐거움이다. 8월 말 무렵에는 일찍 비행을 시작한 부지런한 잠자리들을 잡아 재집통을 채우는 것이 낙이다. 어른이 될수록 왜 겁이 더 많아지는 건지 지금은 벌레를 질색하는데, 그때는 큰 턱을 가진 잠자리를 맨손으로 턱턱 잡곤 했다. 날개들로 가득 찬 통을 들여다보면 용돈이 없어도 부자가 된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잔뜩 부푼 마음으로 돌길을 달려 털털거리는 트럭 뒤에 타 자동차 밖을 창문을 내리고 혀를 낼림거리는 강아지처럼 제법 시원해진 바람을 맞으며 집으로 돌아오면 까무룩 잠에 들었다.

겨울방학 동안에는 건강을 위해서라도 바다에 가야 한다. 지금은 핸드크림을 발라 버티고 있지만 어릴 때에는 건조증이 더 심해 나무에서 진액이 나오는 것처럼 손등 피부가 갈라져 피가 배어 나오곤 했다. 이럴 때 바위에 오목하게 고인 소금물에 손을 가만히 담그면 증상이 신기하게도 완화되었다. 그러면 며칠쯤은 따가움을 잊고 지낼 수 있었다. 소금이 소독작용을 해주는 것인지 이름 모를 미생물들이 닥터피시처럼 손을 치료해 주는 것인지 여전히 원리는 미스터리다. 이 정도면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아니고 아낌없이 주는 바다다. 간단히 민간요법을 마친 후 말은 인내심이 강한 동생은 외할아버지를 따라 낚시터에 남고, 나는 해남할머니와 고동을 채집하러 나선다. 할아버지의 낚시가방은 즐겨보던 비주얼 박물관에 나오는 사진들처럼 눈길을 사로잡는 잡동사니들이 들어차 있었다. 지렁이와 톱밥이 가득 들어있는 종이 상자, 색색의 물감이 칠해진 루어들, 반짝반짝한 낚싯줄, 보기완 달리 막상 들어보면 제법 묵직한 은빛 추. 빨간색 피투성이 손등을 가진 나와 달리 반을 가르면 노란색 피를 뿜어내는 지렁이를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으면 빨리 가자고 할머니가 채근하곤 했다. 본인의 목에는 까칠한 수건을 행여 감기에라도 걸릴까 손주의 목에는 손수건을 단단히 메어주고는 바위를 척척 넘어가는 해남할머니의 모습은 순간이동을 하는 것 같았다. 도도도 뱁새 다리로 바짝 붙으면 언제 발견하신 건지 석화를 칼로 쪼개어 입에 넣어주셨다. 신선한 재료는 양념이 필요 없다. 자연적으로 소금간이 되어 있는 굴에서는 여름의 수분을 가득 품은 싱싱한 오이 맛이 났다. 오이맛이 나서 Oyster인 건가. 요기를 하고 다시 고동을 긁어모으다 보면 노을이 깔리기 직전이다. 체력을 소진한 데다 무거운 겉옷으로 뛰뚱거리며 작은 키로는 한 명이 누울 수 있는 뒷좌석에 수납되어 전기장판이 있는 집으로 돌아간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머리를 말리려 막 문을 열고 나왔는데, 해남할머니는 오늘의 특식부터 입에 들이미셨다. 뜨겁지만 혀가 데이지 않을 온기를 가진 무언가가 쏙 들어왔다. 바로 학꽁치 튀김. 할아버지와 동생이 많은 물고기들 중 제철인 학꽁치를 잡은 거다. 찬곳에서 먹는 따뜻한 음식은 사람을 노곤해지게 만든다. 보일러가 막 돌아가기 시작해 여전히 찬 공기에 놀란 몸을 갓 나온 튀김이 진정시켜 주었다. 얇은 튀김옷에 보드라운 살을 가진 학꽁치를 간장에 찍으니 입에서 녹아내렸다.

식객에 보면 나이를 먹어 친구들끼리 겨울바다에서 낚시한 학꽁치를 얇게 포 떠 꼬마김밥에 얻어먹는 장면이 나온다. 백그림에서도 느껴지는 반질한 학꽁치 회에 입맛을 다시며 젠가 만화에 나오는 학꽁치 김밥을 먹어보아야겠다고 다짐했다.하지만 감히 겨울의 학꽁치의 최고봉은 해남할머니표 학꽁치튀김이라고 말하고 싶다. 고독한 미식가에서는 은어 소금구이를 가리켜 '일본의 여름을 덥석 베어 물어라!'라고 표현한다. 그렇다면 학꽁치 튀김은 '한국의 겨울을 덥석 베어 물어라!'이다. 기에 경직된 살덩이를 튀김의 기름이 파도처럼 넓게 퍼지면 비눗방울이 된 인어공주처럼 완화되는 근육에 몸이 붕 뜨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도 금새 사라진 음식 아련해진다.

어린이의 뇌는 단순하다. 막 삶아져 나온 고동에 이런 아쉬움은 금방 잊힌다. 뱅글뱅글 작은 고동들은 크고 쫄깃한 소라만큼 특별한 맛은 없지만 옷핀으로 찔러 돌려빼내는 재미가 있다. 티끌모아 태산이라고 껍질로 산을 쌓을 만큼 먹다보면 배가 차긴한다. 학꽁치튀김의 강렬함에는 못미치지만 차곡차곡 더해지는 맛이 별미다. 내장의 텁텁함을 따끈한 매실차로 마무리하면 게임 끝이다. 9시 불끄고 자면 된다. 겨울 방학은 대체로 이렇게 마무리된다.


최근 생각만큼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끈적이는 우울감에 쉽게 휘감기곤 했다. 남겨진 허물처럼 가치가 소실되었다고 느끼는 그런 시기다. 그럴 땐 해남할머니와 바다에 갔던 추억을 떠올렸다. 진주처럼 알알이 떠오르는 모래성의 부스러짐, 사라지는 발자국, 청명한 포말을 떠올린다. 그러고서 '해남할머니 덕분에 행복한 어른으로 자랐어요.' 감사하다며 문자를 보내면 짙은 회의감을 털어낼 수 있다. 해남할머니와 바다와 학꽁치 튀김. 이만큼 기분을 환기하기 좋은 보석같은 추억이 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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