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친구, 서울할머니(설탕국수, 육개장)

좋아하는 거란 말이야

by Gourmet

서울할머니 육개장의 비법은?!


서울의 어느 한구석 빌라에서 살던 무렵, 초등학교에 다녀와 낮잠을 한숨 자고 나면 늦게까지 학원일을 하시는 엄마를 대신해 서울할머니께서 저녁을 만들어 주셨다. 할머니가 해주시는 모든 음식이 맛있었지만 그중에서도 2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여름의 얼음 띄운 설탕국수와 겨울의 새빨간 육개장. 반찬을 잘 안 먹는 나와 동생의 성정을 서울할머니가 한 번에 간파하고 한 그릇에 말아먹을 수 있는 음식을 해주신 것이다.

설탕국수는 전라도에서 먹는 음식으로 생소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소면에 보리차를 붓고 설탕을 취향껏 넣은 다음 얼음을 띄우면 끝나는 간단한 메뉴다. 할머니가 큰아버지 가족과 서울에서 오래 사셨기 때문에 서울할머니라고 부르지만 서울할머니는 고향이 전라도로 간장게장, 육전, 팥칼국수 같은 음식들을 기가 막히게 만드셨다. 육수를 따로 낼 필요도 없는 만들기 아주 쉬운 음식인데 여름에는 이만한 음식이 없었다. 더워서 선풍기 앞에 누워만 있는 축 늘어진 몸을 금방 시원하고 힘이 솟게 만든다. 개미가 진딧물의 단물을 먹고 공생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랄까.

육개장은 나뿐만 아니라 모두가 인정하는 맛이다. 서울할머니는 유독 손이 커서 친구들 잔치에 가서도 음식을 많이 해주셨다고 했다. 아빠도 어느 식당을 가도 할머니의 육개장보다 맛있는 집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했다. 진한 고기 국물에 반짝이는 고추기름방울, 부드러운 털실처럼 씹히는 고사리와 감자처럼 파근한 토란, 지방이 적절히 섞인 고기와 시원한 맛을 더하는 숙주. 끓이는 냄새에서부터 범상치 않은 맛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여기에 밥 한 그릇을 말면 칼칼함에 속이 제대로 풀린다. 서울할머니는 조선시대가 조선시대에 태어나셨다면 분명 수라간 최고상궁이 되셨을 거다.

나는 가족들 중에서 서울할머니를 가장 많이 닮았다. 거의 효모가 출아법으로 무성생식을 하는 것처럼 똑같이 생겼다. 어릴 때에는 얼굴만 닮았을 뿐 서울할머니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던 적이 많았다. 가령 육개장이 맛있다는 말을 한 번 드렸더니 오실 때마다 육개장을 끓여주시는 것처럼. 본디 사람이란 당연한 것이 되면 감사할 줄 모른다고 정말 맛있던 음식이 어느새 지겨워졌다. 차마 말씀을 드리지는 못했지만 이제 육개장을 그만 먹고 싶었다. 또 할머니는 새벽부터 일어나서 친구들과 자주 통화를 하셨다. 매일 비슷한 사람들하고 통화를 하시는 것 같은데 뭔 할 말이 이렇게 많으신지 의문이었다. 심지어 이러다간 귀에서 피가 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도 나이를 먹으니 서울할머니의 모든 행동들이 이해가 되었다. 이해만 됐을 뿐이랴, 내가 서울할머니보다 더 심했다. 친한 친구가 어떤 캐릭터를 좋아한다고 하면 그 캐릭터가 그려진 빵이라던가 스티커가 보일 때마다 사준다. 그리고 친구들과 같은 말을 반복하는 통화를 1시간을 해도 지칠 줄을 모른다. 유전이란 이토록 무서운 것임을 점점 더 깨닫고 있다. 이제는 안다. 서울할머니의 행동들이 모두 할머니만의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이었음을. 육개장을 좋아한다는 확실한 사실을 알고 그 점을 실천하신 거였다. 다른 선택지를 좋아할 수도 있지만 당사자가 말한 것을 그대로 이행하는 방법이야말로 실패가 없는 방법이니까.

그래서 요즘은 서울할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시면 새겨듣는다. 나는 서울할머니의 과거이고, 서울할머니는 나의 미래 모습일 테다. 최근 서울에 갔을 때에는 숨겨져 있던 육개장의 비법을 듣게 되었다. 이번에도 한참 동안 지인과 통화를 하다가 끊으시고는 나에게 옛날 그 지인분과 있었던 일을 한차례 풀어내셨다. 그분이 육개장을 맛있게 만드는 비법을 물어봐서 알려주셨다면서. 나는 할머니 성격이라면 '정성을 들여서 오래 끓이면 된다.'라는 정성을 강조한 말씀을 하셨을 줄 알았다. 그런데 이게 웬걸, 작은 반전이 있었다. 서울할머니는 그 물음에 딱 한마디를 하셨다고 했다. '비싼 재료 썼어.' 맛있는 음식의 비법은 손맛도 정성도 아닌 돈이었구나.

물론 모든 요리에서 재료가 중요한 것은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모든 과정을 직접해야 직성이 풀리는 서울할머니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맨날 같은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서 서울할머니를 다 안다고 생각한 것은 나만의 착각이었다. 어쩌면 서울할머니에 대해 알아갈 것이 더 많다는 것을 그날 알게 되었다.


해남할머니, 서울할머니 사랑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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