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칼날을 잘 세워야 한다.
노동청에 제출할 진정서를 작성했다.
그것은 그녀를 보호해 줄 방패이기도 하다.
한때 그녀를 수호했던 은방울은 이제 아무도
주목하지 않으리라.(1화)
그녀를 지켜줄 칼날과 방패를
실수 없이 휘두르고자 두 가지 방향을 세웠다.
칼날은 정의를 세우지만, 방패는 인간을 지켜준다.
상대가 두른 철흉의 갑옷을 벗기기 위해
우리는 하나가 되어 집중하여 움직여야 했다.
하나는 비바람처럼 매서운 칼날을 갈아
상대를 공격하여 확실한 승리를 얻는 것.
다른 하나는 상대가 다가오도록 햇살을 비추어
따스한 손을 내밀어 보는 것.
첫 시도에서는 서툰 의견 타진으로
빛을 불로 오해받아, 차가운 물세례를 맞았다.
물세례의 상처를 응징하듯 서류의 날을 세웠다.
차갑고 예리한 날은 상대를 과감히,
그리고 단번에 찔러 파괴한다.
법과 증거물을 무기로 싸울 태세를 갖추었다.
같은 배를 타기로 각오했던 연인들은
순간, 역공의 물살에 겁을 먹기도 했다.
거짓의 탑을 쌓는 무고죄.
그것은 순수한 그녀와는 상관없는 세상의 영역이기에,
믿고 따라오도록 안심시켜 주었다.
증거 자료가 넘쳐났고
종이는 그녀의 진실한 마음처럼 깨끗하기에,
내 손 안의 펜은 능숙하고 자유롭게 움직였다.
우리의 진정서는 바다보다 투명하고 풍부하여
거센 파도처럼 힘이 느껴졌다.
나는 믿었다. 그것은 어두웠던 그녀의 미래를 밝혀줄
하나의 등대가 되어줄 것을.
서류의 예리한 칼날은 상대를 베어내어
하나의 대가를 얻게 해 준다.
나에게는 속전속결의 기회지만, 그녀에게는
시한부 비자이다.
그녀를 위해서는 연속성을 추구해야 한다.
그것은 나에게 더 어려운 숙제였다.
그녀와 상대가 비범한 바다에서 함께 살아남는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것은 서로가 좌초되지 않도록 손을 잡아주는 일이다.
서로 가라앉지 않기 위해 강렬한 빛보다
은은한 빛을 선택했다.
상대도 어느새 우리 곁에서 서성이는 것을 발견했다.
우리의 칼날이 두려웠던 상대는
마침내 기꺼이 탁상에 앉았다.
그들은 진지했고, 참회의 자세로 달라져 있었다.
우리는 구멍이 난 계약서를 보여주었다.
처우개선, 최저임금 보장, 술 접대 금지
그리고 이 땅에서의 존재를 증명할 등록증 발급.
날 선 서류의 마법에 걸린 듯 상대는 철흉의 갑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했다.
계약서를 처음 작성했던 모습처럼 정갈한 옷차림과
예의 있는 태도가 우리를 무장 해제시켜
마음의 방패를 내려놓게 했다.
함께 손을 잡고 만든 공동 작품, 등록증 신청서를
뿌듯한 마음 반, 불안한 마음 반으로
출입국사무소에 제출했다.
그것은 상대를 무너뜨려 혼자서 얻은 승리가 아니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그들에게도 한 번의 기회는 필요했다.
자신의 이익에 앞서 인간을 존중해야 함을 깨닫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으면 충분했다.
그녀에게는 대한민국 출생증명서와 같고
상대에게는 지난 과오에 대한 면죄부와 같았다.
그녀의 존재를 증명해 줄 등록증은
이 땅에 첫발을 내딛으며 쏟았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노래와 연인을 잠시나마
이어 줄 끈이 되어줄 것이다.
함께 커피를 마셨다. 그윽한 커피의 향은 처음으로
그들의 사연을 불러내었다.
결혼을 반대하던 남자의 아버지 마음 문을 열게 하는 일,
그것이 그들이 해내야 할 또 다른 과제였다.
결혼비자를 의뢰하지 않은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남자의 순수한 마음과 간절함이
내 코끝에 닿은 커피 향처럼,
이 여정을 끝내 이루어내게 한 것이다.
우리는 이어지는 비자를 찾아,
다시 머나먼 여행을 떠나기 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