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프리스에서 온 신사 1

by 열음

꼬리가 꼬리를 물 듯, 때론 의뢰인이 또 다른 의뢰인을 데리고 오기도 한다.

수임을 진행 중이던 의뢰인이 사무실 밖에서

새 고객이 기다린다는 소식을 전화로 전해 왔다.

출근길은 더욱 급해지고, 예약 안 된 손님에 대한 배려는

잠시 내려두기로 하고 가던 속도대로 움직였다.


나의 느긋함 덕분에 머리 희끗한 노신사를

20 여분이나 추위 속에 서 있게 하고 말았다.

과한 배려라 여겼던 마음은 먼저 창문을 열어 얼른 환기해 버린 뒤,

서둘러 상담 준비를 갖추었다.


키다리 아저씨를 닮은 노신사는

예약하지 않고 찾아와서 죄송하다며

내가 해야 할 말을 먼저 해주었다.


짧은 오프닝 동안 노신사의 첫인상은

내 마음의 창도 활짝 열어주었다.

때로 거드름을 피운다고 여겼던 미국인에 대한

편견도 창가의 바람과 함께 날려 보내었다.

상담은 예상대로 편안하게 이어졌다.




그는 미군 부대에서 보안전문가로 근무하고 있으며

15년 전에 한국 여성과 결혼해 살고 있다고 했다.

조만간 퇴직을 앞두고 있어,

A-3 비자에서 결혼이민비자(F-6)로 체류자격을

변경하고 싶다고 했다.


SOFA 협정은 대한민국과 주둔 미군 사이에 체결된

협정으로,

미군 및 가족들은 일반 외국인과 다르게 A-3 비자를

부여받으며,

일반 출입국 절차보다 간소화된 규정을 적용받는다.


북부(동두천·의정부·서울, 강원도 일대)에 흩어져 있던

미군 시설들을 정리하고,

남한 남부의 평택 캠프 험프리스 중심으로 통합되었다.

특히 서울 한복판에 있던 용산기지가 평택으로 이전하면서 규모는 더욱 커져,

현재는 여의도의 약 4.5배, 약 450만 평에 이르는

대규모 기지가 되었다

미군, 군무원, 계약직과 그 가족들로 상시 주둔 인원이 약 2만 5천 ~ 3만 명에 이르며,

현재 미국 본토 밖에서 가장 큰 해외 미군 기지로 자리 잡고 있다.


캠프 험프리스는 1962년 헬기 훈련 중 사고로 순직한 미 육군 항공장교 벤저민 K. 험프리스(Benjamin K. Humphreys) 준위를 추모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딴 군사기지다.

주택, 학교, 대형 병원, PX, 쇼핑몰, 식당가, 체육시설, 극장 등

하나의 도시와 같은 규모를 이루며,

실제로 현장에 가보면 마치 작은 미국에 들어온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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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이 한국에 주둔한 이후, 미국인 남성과 한국인 여성이 만나 결혼해 가정을 이루는 사례가

꾸준히 이어져 왔다.

이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한국인 남성과 동남아시아 출신 여성 사이의

국제결혼문화와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한편, 한국 여성들의 교육 수준과 직업적·사회적

입지가 확대되면서

결혼에 대한 가치관 역시 다양해지고 있는 추세다.




겸손한 노신사 역시 20년 전 오산의 한 보안업체

취업을 계기로

한국과의 인연이 시작되었고, 한국 여성을 만나

결혼까지 이어진 것이다.


노신사의 배우자인 한국 여성이 몇 시간 후 방문했다.

예의 바르고 점잖은 노신사와는 상반된 분위기였다.


결혼비자의 필수 요건인 경제적 소득을 묻자

대뜸 “제가 사기당해서 남편 돈을 많이 까먹었어요.”

라고 말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표정 관리가 도무지 되지 않았다.


노신사는 아내의 무장해제 같은 고백에도

개의치 않고 예금 통장을 보여주었다.

꽤 묵직한 액수의 달러가 차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철부지 아내를 품은 넓은 바다와 같은 노신사

인품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험프리스에서 온 신사 2>는 연재 10화(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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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택 미군부대앞 로데오에 있는 공연장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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