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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절함이 이끄는 길 1

어머니의 눈빛

by 열음

언뜻 어머니 또래로 보이는 분이 찾아왔다.

진지한 눈빛과 꽉 다문 입술에서

어머니의 단단한 엄격함을,

말끝에 스며있는 교양과 사려에서는

어머니의 포근함을 느꼈다.

그분은 나와 비슷한 또래인 아들과 딸이 있었고,

두 사람은 미국의 시민권자이다.

자녀들의 동포 비자(F-4)를 의뢰하고자 방문했고,

‘대한민국 국적상실’이라는 절차가 선행되어야만

비자 발급이 가능한 일이었다.




행정은 가끔 엉킨 실타래를 풀어야 할 때가 있다.

잘 풀어보려다 오히려 더 얽혀 지치면

손을 놓고 싶어진다.

꼬이기 시작한 지점을 정확히 찾아내어,

예리한 송곳 끝으로 한 올씩 풀어내듯

관공서의 잘못된 행정을 찾아,

하나씩 바로 잡는 일이 행정전문가가 할 일이다.


두 남매는 국적상실을 신고하기 위해서,

미국 영사관에 갔으나 하지 못했다.

미국에 입양되면서 한국 내 가족관계부가 흩어져 버려,

떨어져 있던 가족관계의 벽돌을 다시 하나씩 쌓아 올려놔야 가능했다.

두 남매의 어머니는 엉켜버린 실타래를 풀기 위해 찾아온 것이다.

어머니에게 그것은 단순히 비자 발급을 넘어선 남매가 던져준 숙제였다.

숙제를 끌어안은 이는 반드시 해내야 한다는

마음의 무게에서 자유로 울 수 없다.




그분은 자녀들에 대한 자부심이 높았다.

어린 시절, 엄마의 재혼으로 미국인 아버지에게

입양된 자녀들은 양아버지의 나라에서

언어의 벽과 인종차별을 견뎌내야만 했다.

현재는 워싱턴 D.C. 에서 부와 명예를 누리고 있다는

두 자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분의 인생에 새겨졌을 굴곡이

얼마나 거칠고 험난했을지 자연스레 짐작이 갔다.

그렇게 강인했던 분이 자녀들의 숙제에 대한

집념과 의지에 가끔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눈빛은 무조건 해내야만 한다는 강한 표현이었다.


꼬인 부분을 한 올씩 풀어내어 입양 전의 가계도가 만들어졌다.

이후부터는 미국 영사관에서 본인들이 하면 더욱 간단한 일을 굳이 한국에서 엄마가 끝까지 해주고 싶다고 하면서도,

막상 미국 시민권 원본을 준비해 달라 요청하면,

미국의 불안한 상황상 사본으로 갈음해 달라고 호소했다


이성의 추에 힘이 실리자

불가능한 사유들이 연기처럼 스멀스멀 떠올랐다.




친정어머니와 동갑인 그분은 딸 이야기를 하며,

“행정사님처럼 아주 똑똑하다” 하며 나를 좋아했다.

초등학교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 편견과 핍박 속에서도

딸은 당차게 자신의 자리를 지켜냈고,

약자의 입장에 놓인 한국 사람을 도울 만큼 강단 있다고 말했다.

내 이성은 점점 힘을 잃어 가며,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오기도 했다.

현재는 딸이 유능한 미국인 남편과 가정을 이루어

자녀 넷을 키우며 안정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그분의 눈에서 강한 빛이 보였다.

나는 여권 사진으로만 만난 그녀와

그녀의 어머니를 통해 어느새 교감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눈빛을 통해 그녀의 눈빛을 보았다.

의뢰인의 간절함은 곧 나의 간절함이 된다.

간절함은 언제나 위대한 힘을 품고 있다.

나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여, 바로 행위로 이끈다.

행위의 도출은 저울질에서 출발한다.

‘이성과 감성’

감성의 추에 더 무게가 실릴 때, 더욱 고뇌한다.

‘불가능’이란 이성적 사고에서

‘가능’으로 전환시키는 힘이 있다.


의뢰인의 간절함과 나의 간절함이 하나가 되면

감각이 열리어 결국 지혜와 용기를 이끌어낸다.

그리고 보이지 않은 그 무엇이 움직여

‘성공’이라는 결실을 선물한다.

업무를 하다 보면 알게 된다.

확신 속에서 변수가 발생하고,

불확신 속에서도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는

늘 겸손함을 잃지 않고 초심이 제자리를 지키게 된다.


결국 내 생각을 아니, 이성을 조금 내려놓기로 했다.

일단은 해보기로 했다. 결과는 운에 맡기면서…



* <간절함이 이끄는 길 2>는 연재 8화(월)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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