험프리스에서 온 신사 2

by 열음

험프리스에 온 신사 1


결혼비자의 필수 요건인 경제적 소득을 묻자

대뜸 “제가 사기당해서 남편 돈을 많이 까먹었어요.”라고 말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표정 관리가 도무지 되지 않았다.


노신사는 아내의 무장해제 같은 고백에도

개의치 않고 예금 통장을 보여주었다.

꽤 묵직한 액수의 달러가 차분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철부지 아내를 품은 넓은 바다와 같은 노신사의

인품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험프리스에서 온 신사 2


결혼이민비자를 발급받기 위해서는

국민의 소득 요건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현재 수입은 있나요?”

“아니요.” “계속 남편 돈만 날렸어요.”

무표정하게 내뱉는 그녀 앞에서

내 질문은 점점 힘을 잃어갔다.


그녀의 냉소적인 표정과 말끝에는

묘한 매력이 느껴졌다.

무소득이지만 당당한 태도,

무표정에는 정직함이,

짧은 답변 속에는 깊이감이 느껴졌다.


무채색의 그녀에게 어떻게 본질을 꺼낼 수 있을지 잠시 고민했다.

“저렇게 좋은 남편분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어휴, 제가 처음 만났을 때는 걸어 다니는 시체였어요!”

“정말요?”



남편은 미국에서 선천성 희귀 질환을 앓은 아이를 잃은 적이 있다고 했다.

16년 동안 아이 병간호에 돈과 삶을 모두 걸었지만,

결국 아이는 열여섯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후 그는 끝없는 어둠의 터널 속에 완전히 갇히게 되었다.


슬픔에 잠긴 전처에게 컴퓨터를 사준 것이 화근이 되어,

이성과의 채팅에 빠지면서 부부 갈등으로 이어졌고,

아이 죽음에 대한 책임은 남편의 몫으로 귀결되었다.


더 이상 버틸 끝자락이 없어져

남편은 미국이 아닌 외계로 비행했고,

착륙지는 대한민국 오산이었다.


새로운 행성에는 아내와 아이 대신

클럽의 여자와 술이 있었다.

하루 벌인 돈은 여자와 술로 모두 사라졌다.


아이에게 모든 것을 바쳤던 지난 삶처럼

술과 여자에도 영혼을 내던진 그는

인기 있는 호구로 등극했다.

그에 대한 대가는 쇠약함과 빈털터리였다.




좀비가 된 그에게 생기를 넣어 줘야만 했다.

아이에 대한 트라우마는 병원을 거부했고,

정신과 신체는 죽은 아이를 향해 쫓고 있었다.


클럽세계에서 호구라는 높은 직책에 앉아

술과 여자들의 늪에 빠져있던 남편에게

그녀는 치유와 회복이라는 밧줄을 던져주었다.


호흡을 잃어가던 그에게

매일 한약과 홍삼 같은 보양식을 챙겨 먹이며

소생을 향한 정성을 다했다.


그녀는 빚을 갚기 위해 돈이 필요했고,

클럽 카운터에서 일하다 그를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다른 여자들처럼 그를 돈으로 보지는 않았다.

자가호흡이 안 되는 중환자처럼 여기며,

필요한 산소를 묵묵히 공급해 주었다.




남편은 그녀를 위해 무엇을 해줄 수 있을지 깊이 고민했다.

그리고 빚을 청산할 방편으로 그녀에게 동거를 제안했다.

자신의 집에 머물며 생활비를 줄이게 하는 것이

그가 선택한 보은의 방식이었다.


남편은 다리가 부러진 제비처럼

그녀의 정성 어린 보살핌 속에서

조금씩 상처를 회복해 갔고,

고연봉의 전문 보안가로서 수입 또한 안정되어 갔다.


그는 고마운 그녀에게 박 씨 한 알을 물어다 주고 싶었다

아무 조건 없이 도움을 베푼 그녀에게 박 씨는 선의의 씨앗이었다.

박을 타는 순간 삶의 방향이 바뀐 흥부처럼

그녀도 빚더미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두 사람의 함께한 세월이 어느덧 20년에 가까워졌지만 자녀가 없다.

남편은 지금도 죽은 아이의 생일이나 세상을 떠난 날이 되면,

잠을 이루지 못한 채 혼자만의 세계에 가라앉는다고 한다.

존재감을 드러낼 수 없는 그 시간 동안,

그녀는 남편의 영혼이 현실로 되돌아오기까지 반려견과 함께 묵묵히 기다려야 한다.


편식이 심하고 입맛도 까다롭다고 한다.

언제 다시 다리가 부러질지 모르는 제비를 돌보듯

야채주스부터 홍삼, 장려삼, 침향환까지 건강식품을 종류별로

남편을 위해 공수하여 돌보면서도

자신의 헌신은 드러내지 않고,

오히려 남편의 인품과 공로를 높이는 그녀가 아름다웠다.


“제가 남편 돈을 다 까먹었어요.”

“집도 잘 안 치우는데도, 잔소리도 안 해요.”

무뚝뚝하게 말을 던지는

그녀의 얼굴이 이상하리만큼 해맑았다.


상담을 마친 뒤, 그녀가 떠난 자리에는

기품과 겸손이 가득했던 노신사의 첫인상이

여전히 남아있었다.



평택 험프리스의 크리스마스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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