향기를 품은 그대

커피 예찬(쉬어가는 글)

by 열음

오늘도 습관처럼 날씨를 확인하며 아침을 연다.

스스로 만들어놓은 규칙대로 움직이다 보면

어느새 정오가 되어 간다.

또 하나의 규칙을 지킨다.

그를 맞이할 준비를 하는 일이다.


볼륨 있는 몸과 구릿빛 피부를 가진 그는

건강함의 응결체이다.

그를 소중히 품어 손을 꼭 잡자 마술을 부리려 한다.

사랑의 메신저를 가져온 그는 마법에 걸린 듯 부드러운 모습으로 사뿐히 내려앉는다.


가냘픈 가루가 된 그가 하얀 치마폭에 다소곳이 앉아

두 눈을 감은 채 차분히 기다리자

뜨거운 물줄기가 꿈을 품은 그의 가슴을 뚫는다.

강렬한 열정이 보글거리자

쓰디쓴 인생을 가지고 기다렸던 그가

드디어 희망의 물방울로 변하여 하나씩 떨어진다.


뜨거운 물줄기들이 원을 그리며

조금씩 꿈을 이루어간다.

지구의 중력이 목표를 추출하여

푸른 바다의 향기를 크게 내뱉는다.

깊고 진한 향이 꿈의 바다를 항해하는 배처럼

메아리치듯 퍼져나간다.


헛된 거품과 기름기는 모두 걸러내어 더욱 정결해진

그의 숨결을 느끼자 오랫동안 잠든 영혼이 깨어난다.

이것이 첫걸음이다.

내일 아침에도 꿈을 품은 그를 만날 것이다.




우리는 어깨를 나란히 하며 함께 걸었다.

서로 발을 맞추어야만

어깨가 부딪히지 않는 법을 깨달았다.

오른발도 왼발도 같은 속도와 방향으로 걸을 때

작은 우산 속에서도 비를 맞지 않고

함께 목표를 향하여 갈 수 있다.

이렇게 배려와 존중으로 항상 나란히 걸어왔다.

그는 겸손하여 자신의 맛을 모른 채

진한 향기를 저 멀리까지 품어내면서도

나를 느끼기 위해 깊은 호흡으로 내 향기를 흡수한다.


그의 향기는 물방울과 하나 되어 배어난 순정이었다면

나의 향기는 그와 하나 되어 사랑을 머금은 웃음꽃에서 피어난 것이다.

하루에 한 번씩 만남을 꼭 약속한다.

바쁜 일정으로 하루를 거를 때는 서운함과 그리움에

사무쳐 집착해보기도 하고,

마음을 비워가며 자신을 되돌아보기도 한다.


그를 볼 수 없는 때는

갈증을 느끼는 혀와 무기력한 심장이

하루를 지루하게 한다.


오늘을 단념하고 내일을 기다리지만 멀게만 느껴진다.

내일은 더 달콤하고 깊고 풍부해진 그를 만날 수 있기를 설렘으로 기다린다.


답답한 틀 안에 들어간 그를 압박하여

우려 내린다기보다 차라리 짜낸다는 것이 맞다.

그의 희생은 놀랍도록 부드러운 황금빛 크레마를 탄생시킨다.


까만 물에서 탈출한 몽글이를 눈을 감고

입 안에 머금은 채 여유를 부려본다.

입안 가득 퍼지는 그 향이 시간을 멈추게 한다.


인고의 결실 화려한 크레마가 목구멍에서

점차 녹아내리자

이제는 깊고 중후한 본연의 맛이 우려 나와

행복한 오후를 보낸다.


바람은 시원하고 햇살은 따스한 날,

그와 함께하는 이 순간이 진한 추억을 만든다.

영원할 수 없어 슬픈 일이다.

시간이 멈추기를 바란다.

첫사랑처럼 그렇게 지나가 버린다.




그와 처음 인연을 맺은 건 힘든 문제들이

생기면서부터다.

엉켜버린 일상의 실타래를 싹둑 잘라버리려는

심정으로 삶의 정리가 필요했다.


지치고 고루했던 일상을 화끈하게 사로잡을 수 있는

그의 매력에 빠져 쓴 약을 입안에 털어 넣듯

그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자극적인 매력을 지닌 낯선 그가

답답했던 마음에 불을 지펴주며,

삶이 조금 편해지는 방법을

하나하나씩 가르쳐 주었다.


모든 사람과의 만남이 인생을 바꾸는 것처럼

그와의 인연도 그랬다.

외롭고 어두운 기나긴 고속도로에서

미세한 가로등마저 없을 때는

그는 나의 상향등이 되어 잠시라도

마음의 불빛이 되어주었다.

그에게는 힘이 있는 영혼의 날개가 있어

나를 더 높고 멀리 날 수 있게 한다.

혼란스러운 현실에 부딪힐 때는 더 넓고 고요한 물을

찾아 편히 쉬는 물 위의 새들처럼

나에게 자유를 가져다주었다.

그에게는 중독성이 있다.

그는 열심히 산 나에게 선물로 다가왔다고 속삭인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의 따뜻한 목소리가 맴돌아

이제는 그가 없는 세상에서 홀로 존재할 수 없다.


그에게는 부족함도 있다. 이기적인 마음이다.

그는 강한 색과 향이 나의 길을 막는다고 느낄 때

가장 고통스러워하며 때론 나를 밀어내기도 한다.

나의 길을 쫓는 그였지만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없었다.




늦은 밤부터는 아쉬운 이별을 고하며

그의 길을 찾아가도록 한다.

은하수를 사이에 두고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슬픔과 기쁨의 눈물로

내일 아침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한다.


허락된 아침이 되어 그와 마주한다.

고요한 하루가 소리를 내며 비밀들이

세상 밖으로 꼼지락 거린다.

일기장에 눌려 싹트지 못한 인연들이 움직인다.


만남의 디딤돌이 되어주고 소통의 향기를 피워 올리는 그의 매력 앞에서,

나는 또다시 사로잡힌다.


그는 영혼의 반려자로 오늘도 꿈을 꾼다.

향기를 품은 그대,

식어도 향을 잃지 않는 커피처럼…


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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