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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병

by 떰띵두

어수선한 틈을 타고 찾아드는 이유 모를 불안.

이것이 바로 무료함이다.

무료함이 얼마나 큰 불안을 만들어 내는지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결코 알지 못한다.

내 일정표에 더 이상 스케줄이 기록되지 않을 때,

지금 긁적이는 이 글이 마침표를 찍고 나면 해야 할 일이 더 이상 없을 때.

멍하니 TV를 보며 시간을 보내는 내 모습을 의식하게 될 때.

나는 몹시도 당황스럽다.

만날 사람도,

할 일도,

해야 할 일조차 없으니

언제나처럼 반복적으로 내 안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 나올까 무서워 미리 예방주사를 맞듯 허겁지겁 결국 나는 하지 말아야 할 것들의 문을 열고 후회를 시작한다.


'괜히 전화했네'

'말이 많았네'

'괜히 호들갑을 떨었네'

'니가 짐을 만드는구나 만들어'

'또 멍청이 같은 짓을 하네'

이렇게 쫓기듯 속없이 서두르곤 곧장 후회를 한다.

미친 짓이다.

곧장 스스로에게 호통을 친다.

'정신 차려!!!'


무료함에 적응하려 참 무던히도 애를 썼다.

그래서 나는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하다.

전혀 그러하지 못하다.

나는 이 무료함이 여전히 불안하고 불안하다.

자꾸만 쓸모없는 인간이 되어가는 듯하여 심장이 아프다.

추스르고 추슬러보아도 이 초라함은 쉬이 가시질 않는다.

이것이 일에 미쳐 살던 나의 후유증이다.


좋아서였고

어쩔 수 없었고

다른 방법을 몰라서

그냥 미친 듯이 일했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는 일인지 가늠할 여유조차 없을 만큼 정신없이 그냥 미쳐 일했다.

그렇게 미친 듯이 일하고 있으면 나는 좋았다.


미친 듯이 일하는 나는

스스로의 효용감에 만족해했고

그 만족감은

내가 누군가를 위해 또 무언가를 위해 그래 무엇인가를 위하고 있다는 믿음을 만들었고

이 믿음은

곧 나에게 내일은 좀 더 평온하고 평안할 거라는 확신을 갖게했다.

그러함에 안전한 오늘을 나는 굳건히 미쳐 일할 수 있었다.

미쳐 일하는 나 스스로를 사랑할 수 있었다.


그러다 어느날 이렇게 불쑥 계획 없이 찾아온 여유.

후다닥 찾아 든 여유

하지만 온전하지 않은 이것은 여유라기보단 무료함.

부쑥 찾아온 여유에 반가움이 가시기도 전에 이것은 꾹꾹 눌러 지켜오는 나의 평화를 깨고 만다.

와장창 부순다.


이 무료함은 지난 나와는 달리 또 나를 미치게 한다.

답답해 미치고

억울해 미치고

갑갑해 미치고

가여워 미치고

화가나 미치고

미안해 미치고...

이렇게 미치고 나면

새로운 눌림목이 하나 만들어져 한동안 새로운 평화를 지켜낼수 있게 되고 이것에 감사한다.

그리고 나는

이만큼의 감사함을 보는 이 정도의 성숙함으로 나를 위로한다.


그래서

오늘의 이 발병이 열병이 아닌 간절기 지나가는 콧물감기 정도이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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