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과 1사이 - 김보영"을 읽고
존재라는 키워드는 아무리 얘기해도 질리지 않는다. 항상 그를 주제로 얘기를 나눠봐도 결국 답을 찾지 못한 채 제자리로 돌아오지만, 그 과정에서 우리 존재의 정의가 부분적으로나마 채워진 것 같다는 묘한 위로감을 주면서 인생이 뭔지 조금은 알겠다는 일시적인 착각을 선물한다. 그리고 같이 따라오는 일시적 안정감. 뭐 결국 다시 현실로 뛰어들어 여기저기 치이다 보면 "나는 누구? 여긴 어디?" 를 남발하며 "존재든 인생이든 알지 못하겠다"라고 하게 되지만.
[0과 1사이]를 읽으면서 사자의 가면을 쓰고 활동하는 아프리카 원주민 주술사가 떠올랐다. 칼 융이 소개한 적 있는 내용인데 그는 가면을 씀으로서 사자의 상징성을 입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사자와 완전히 동일시한다는 것이다. 즉, 본인이 주술사이며 동시에 사자라고 믿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이러한 사고는 절대 이해될 수 없고 허용될 수 없다. 주술사와 사자의 사전적 개념은 절대 합리적으로 동일시될 수 없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오직 합리적인 것만 의식에 넣어두고, 비합리적인 것들은 무의식에 세계로 격리시켜 숨겨둔다. 다만 원시인 사회에서는 가능하다고 했다. 그들은 만사에 대한 뚜렷한 구분이 없고 무의식과 의식이 마구 융화되어 스스로를 사자라고 믿는 것이 가능하다고 한다.
0과 1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합리적 사고방식은 존재의 여부를 "to be (1)" or "not to be (0)" 만으로 정의한다. 있으면 1, 없으면 0. 이것은 1+1=2인 것 마냥 명명백백하다. 하지만 세계관이 더 확장되면 우리가 확률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가능해진다. 수많은 멀티버스 속에 "나"라는 주체는 계속해서 다른 선택을 하며 해당 순간마다 "나의 존재"에 선명함과 희미함을 가감하는 것.
그러한 세계에서 존재한다면, 나는 희미해지지 않기 위해 다른 세계의 나를 열심히 응원하는 희한한 이타심(아니면 이기심이라 해야할까?)을 발휘할 것인가, 아니면 그딴거 알게 뭐냐고 바쁘다 바빠 외치면서 하루를 살며 합리적 무관심을 유지할 것인가. 만약 내 존재가 희미해져 점점 0에 수렴해가면, 그래도 나는 내가 1로서 존재하는 세상 속에서 적당히 1인분을 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내 존재에 대한 책임감 마저 같이 희미해져가게 될 것인가. 10%만 존재하는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그냥 이런저런 생각을 해본다.
인간을 온전히 물질로서 환원시키면 65%의 산소, 18%의 탄소, 10%의 수소, 3%의 질소, 1.%의 칼슘, 1%의 인, 그리고 기타 무기물질들. 물질로서 경제적 가치는 $150 정도라고 했다. 물론 인체가 유기적 활동을 한다는 데에 가치가 있지만, 껍데기만 놓고 봤을 때 인간은 참 하찮다. 하지만 의식으로 인해 우리는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사자가 될 수도, 0.3448이 될 수도, 또는 2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현대인으로서 체득한 합리적 사고방식이 우리의 정체성을, 나아가서 우리 존재를 제한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