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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ㅁㅁㅁㅁ Sep 17. 2022

어떤 대화

내향인이 바라는 저녁식사

우리는 밥 먹듯 대화한다.


밥 짓듯 말을 지어내고, 말을 골라 맛깔나게 이야기한다. 대화는 요리이기도, 식사이기도 하다. 대여섯 명이 함께하는 저녁 시간, 맛있는 음식과 함께 빈틈없는 대화가 이어진다. 몇몇이 분위기를 띄운다. 여기에 독보적인 이야기꾼이 있다.     


그의 이야기보따리에서 재료가 쏟아져 나온다. 직장 동료, 아는 동생, 친구의 애인, 건너 건너 들은 그 사람, 너도 알고 나도 아는 화제의 인물. 그게 누구든 그의 도마 위에 올라가면 기가 막힌 요리가 된다.      


그는 망설임이 없다. 쓸만한 부위만 탁 덜어내서, 뚝딱 선보인다. 재료의 배를 갈라 창자, 똥집까지 구석구석 손질할 새가 없다. 테이블 회전율을 높여야 매출이 오른다. 휙휙 넘어가는 대화 주제와 북적북적 오고 가는 사람들. 그는 노련해서 재료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갑오징어의 몸통과 다리 식감이 어떻게 다른지, 10개의 다리 중 어떤 다리가 더 길고 부드러운지, 어떤 효능과 주의점이 있는지 알게 뭐람. 튀기면 다 맛있다는 주의다.      

<그의 3단계 요리법>

1. 일단 재료를 썰어라. 단면이 중요하다. 복잡한 건 딱 질색. 여러 관점은 피곤하다. 확실한 단면으로 도파민을 자극한다.

2. 현대인에게는 스피드가 생명! 적당히 썰다가 센 불에서 익힌다. 장황한 부연 설명은 생략한다.

3. MSG를 아낌없이 뿌린다. 있는 그대로의 자연식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 자극적인 각색과 과장은 필수다.     


여기서 3번, MSG만 제대로 넣어도 성공이다. 관심을 집중시키는 마법의 단어는 감칠맛을 더한다. 그는 사람들이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아는, 천재적인 요리사다. 홀린 듯 듣게 된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너도나도 보따리를 풀어서 타다닥 손질.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가 오감을 자극한다. 휘둥그레, 끄덕끄덕, 아이고, 대박, 진짜로? 따위의 자동반사적 감탄사가 낄 틈도 없이, 다음 타자가 치고 나온다. 귀에 꽂히는 재밌는 썰을 풀고, 툭툭 치고 빠지는 리액션이 분위기를 살린다.     


3시간쯤 지났을까. 자극적인 남 이야기의 향연, 끝도 없는 요리경연대회, 지칠 줄 모르는 마이크 쟁탈전에 지쳐간다. 입이 텁텁, 속이 더부룩. 온몸이 비틀리며 영혼이 탈출한다. 터지기 일보 직전의 가마니는 성능 좋은 스피커들 사이에 껴서 가만가만 듣고 있다.     


나는 그들에게 어떤 재료로 쓰일까? 내가 모르는 식탁에서 어떤 맛으로 선보여질까? 다들 제 얘기 들으셨나요? 입맛에 맞으실지 모르겠어요. 우와. 저 같은 재료도 그런 요리가 되는군요. 아무래도 괜찮으니 언제든지 꺼내 드세요.


시계를 본다. 9시면 끝날 줄 알았건만.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없을까 눈빛을 읽어본다. 한 자리에 대여섯 명이 넘어가면 모인 ‘사람’보다 모임의 ‘분위기’가 더 우선시 되는 느낌을 받는다. 오랜만에 모인 자리의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다. 이왕 모인 거, 톨스토이의 말마따나 가장 중요한 사람은 지금 함께 있는 사람이니까, 함께하는 시간에 충실해 보자며 거듭 자세를 고쳐 앉고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절레절레. 고개가 말을 안 듣는다. 이런 분위기는 힘들다. 단체, 집단, 사회생활에 진심이 낄 자리는 없는 것 같다. 관심도 없는 사람 이러쿵저러쿵 가십과 험담은 불편하고, 맛집과 핫플, 제휴 혜택, 호캉스, 주식, 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는 아무래도 흥미가 없다. 그런 유익한 정보들은 제가 궁금할 때 검색해볼게요.     


터덜터덜 집에 오는 길, 이 모임이 왜 지쳤을까, 한두 시간이 지나면 집에 가고 싶은 이유가 뭘까, 생각해본다. 분명 그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나름의 가치를 추구하며 열심히 살아가는 좋은 사람들인데. 아무래도 문제는 나였을까. 낯선 자극에 쉽게 날을 세우고, 거북이가 등딱지 속으로 쑥 숨어버리듯, 마음을 숨겨서 그랬을까? 나에게 호기심과 용기, 관심, 애정이 있었나? 체력이 없는 게 가장 문제일까? 기껏해야 세네 시간 지속되는 배터리부터 갈아야 할까? 질문을 던져보지만 아무래도 나는 상다리가 휘청 휘어질 것 같은 대화가 부담스럽다.  


나는 조용한 식탁에서 입맛이 비슷한 사람 한둘과 정다운 대화를 주고받고 싶다. 마트에서 골라 담은 재료가 아닌 각자의 인생에서 직접 기른, 실제로 보고 듣고 경험한 무언가를 꺼내서, 진하고 깊게 우려 만든 요리가 좋다. 표면적인 남 얘기보다는 당신의 내면을 듣고 싶다.


청중을 사로잡는 현란한 요리 솜씨와 상대방의 음식이 끝날 새라 자기 요리를 내세우는 경연 분위기는 피곤하다. 나는 당신의 음식이 나오면 온 감각을 기울여 맛보고, 곁들여 먹을 수 있는 반찬을 하나씩 더해가면서, 당신과 함께 조화로운 한상차림을 만들어가고 싶다.


맛이  싱거우면 어떻고 요리 실력이 서투르면 어떤가. 천천히 나눠 먹으며, 충분히 소화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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