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페즈(Fez)로 돌아가는 택시 안, 우리는 시속 100km로 달리고 있다. 차창 너머 황량한 풍경이 머릿속을 비워낸다. 아틀라스 산맥은 하늘을 떠받쳤다는 신화가 무색하게 지루함을 더하고, 운전사도 따분한지 핸들을 놓고 선글라스를 매만진다.
그나마 날씨가 색칠하듯 풍경을 바꾼다. 햇빛이 사라진 자리에 모래 폭풍우가 휘몰아치더니 어느새 눈발이 흩날렸다. 자연의 변덕은 화성같던 도로 한복판에 뜻밖의 무지개를 펼쳐 보였다. 모두가 홀린 듯 휴대폰을 들어 닿을 수 없는 환상을 붙잡았다. 여전히 같은 길을 끝없이 질주하지만, 눈앞의 선명한 무지개는 우리를 전혀 다른 곳으로 이끌었다.
7시간이 어떻게 지났을까. 잠들고 깨기를 반복하다가 수첩을 꺼낸다. 이곳에 와서 매 순간을 샅샅이 기록하는 습관이 생겼다. 일기는 와이파이의 공백을 채워주는 소일거리 이상으로, 외부의 자극과 내면의 목소리가 주고받는 일종의 대화이자 누군가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지금의 내가 남긴 혼잣말을 가장 재미있게 볼 사람은 5년이고 10년, 세월이 한참 지난 뒤의 자기 자신이다. 인생이 황무지 도로보다 지겨워지는 순간이 올 것이고, 지금의 추억이 그때의 무지개가 될 것이다. 미래의 무지개를 남긴다.
모로코에서의 이틀을 돌아본다. 고통과 아름다움이 교차하는 곳, 사하라 사막은 일상의 대척점이었다. 내 DNA는 1퍼센트라도 사막을 겪어본 일이 없다. 낙타는 그렇지 않았다. 기다란 속눈썹과 넓적한 발, 곱슬거리는 털이 지금까지 사막의 후예로 살아온 세월을 증명했고, 나약한 인간을 태워 묵묵히 함께해줬다. 고마웠지만 괴로웠다. 낙타가 걸을 때마다 모래가 푹푹 꺼지며 덜컹거리는 감각은 반나절이 지나도 적응이 안 됐다. 살면서 올라타 본 것이 버스, 자동차, 자전거, 기껏해야 오리배였던 우리에게 생소한 이동 방법이었다. 푹푹, 덜컹, 흔들. 반복은 명상으로 인도한다. 머릿속 잡생각을 비워내는 데 그만한 게 없다. 내리쬐는 햇빛과 뜨거운 모래도 거들었다. 색다른 수련 환경에 정신이 혼미했다.
베르베르인 가이드는 한국말을 잘했다. “낙타 귀여워”, “대박 사건”, “괜찮아요?”, “가자!”를 외치며 지친 우리를 일으켰다. 인생 사진을 남겨주려는 그의 열정에 쉴 새 없이 점프를 하게 되었고, 베르베르 전통 음식으로 차린 진수성찬에 피로가 가셨다. 언덕에서 샌드 보드를 타며 엉덩방아를 찧다가 ATV로 짜릿하게 질주하기도 했다. 사막의 오아시스 같던 순간들이 지나고 세상은 파스텔톤으로 물들어 공기가 서늘해졌다. 해가 떨어지기 전에 서둘러 베이스캠프로 이동했다.
베이스캠프에는 화장실이 없어서 모래를 파던가 덮어서 볼일을 봐야 했다. 한 마리의 낙타가 되었다. <사막에서 살아남기>라는 책 제목에 걸맞게 사막의 환경은 가혹했다. 낮의 뜨거움이 순식간에 식어 온몸에 한기가 돌았다. 영하로 떨어진 1월의 사막 한가운데 난방이라곤 전혀 없는 천막이 못 미더웠지만, 그런 것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두세 겹의 두꺼운 담요인지 쌓였던 피곤인지 모를 무게감에 짓눌려 금세 잠들었다.
1박 2일 동안 극한의 환경과 자연의 신비함에 압도됐다. 이곳은 하늘과 땅으로 이루어졌고, 밤하늘의 별은 우주를 가리켰다. 우주는 마음을 비워냈다. 쏟아지는 찬란한 별빛 아래 무엇이 문제가 될까? 세상만사 스트레스가 사막의 모래 알갱이와 다를 바 없다. 무한의 신비에서 사소한 마음의 1은 0과 다를 게 없고 0과 다를 게 없는 척박함에서 소중한 1은 전부와 같다.
요즘도 가끔 일기장을 펼쳐 사막 한복판으로 들어간다. 경험은 발화와 기록을 통해 조각조각 기억되고, 기억을 거듭할수록 생생하게 떠오른다. 언제든 눈을 감으면 그 장면으로 들어가 같은 고통과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 그것으로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