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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ㅁㅁㅁㅁ Sep 14. 2022

요가 망상

아마도 나는 사천 년 전 요가 수행자였다. 나는 영적 지도자 구루를 따라 인도 전역을 떠돌며, 모든 자연물에 영감을 받아 움직임을 창조했다. 나무 옆에서 나무 자세로, 참새가 머리 위에 똥을 싸는 줄도 모르게 명상을 하거나, 코브라 자세를 하다가, 자신이 코브라가 되기라도 한 듯 피리 소리에 반응하고, 돌 위에서 돌처럼 앉아있다가 눈을 뜨면 삼 일이 지나있는, 그런 일상을 보냈다. 당연히 집도 가족도, 돈도, 먹을 것도 없는 자유의 몸이었고, 가난한 떠돌이 생활에서 알 수 있듯, 우리는 당시 주류 계급의 요가 정신과는 사뭇 다른, 비주류 요가 세계를 구축했다. 굴하지 않고 갠지스강 유역에서 수련을 이어나가며 세력을 키웠고, 역시나 권력층의 눈 밖에 나고 말았다. 우리는 눈에 띄는 족족 잡혀 들어갔다.
비록 이단으로 핍박받았지만, 누구보다 요가를 사랑했던 나는 감옥 속에서도 기어이 시르사아사나 자세를 수련하며 자유를 꿈꿨는데, 아무래도 장소가 협소한 나머지, 발끝이 창살을 툭툭 건드렸고, 밤마다 잠에서 깬 맞은편 죄수의 민원 제기로, 결국 세상을 떠났다.       

그 후 일곱 번쯤 환생을 거듭했다. 어쩐지 까닭 모를 그리움 내지는 공허함을 느끼고, 매번 인생에 의미를 찾으려 애쓰지만, 찾는 게 요가인지 담배인지 연인이나 가족인지 알 턱이 없어, 되는대로 살다 죽길 반복하다가 지금에 이르렀다.      

이번 생은 대한민국 직장인의 삶이다.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인만큼, 시험지와 컴퓨터 모니터, 스마트폰 앞에서 평생 끔찍한 벌 ‘거북이 자세’를 수행해야 한다. 차라리 거북이가 되는 게 낫겠다 싶다가도, 괜히 어항 신세가 되면 매한가지 서러우니 그냥 받아들인다. 수조와 다를 게 없는 신자유주의 착취 사회에서 목은 거북이, 등은 새우, 손목은 꽉 막힌 터널 형체를 띠며, 발목은 아자아자 아작 났다. 급기야 감옥도 학교도 엘리베이터도 아닌, 자신의 몸에 갇혀버려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칠 때마다 우두둑 삐거덕 소리 나는 신세. 이대로라면 근육이 화석으로, 림프가 고인 물 되는 것도 시간문제다.     

그러다 2017년, 집과 직장만 오가던 무기력한 현대인에게 희망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가 다녀봐. 힐링이야.”

힐링이라면 또 귀가 번쩍 뜨여 회원권을 끊지. 처음엔 가능한 동작이 하나도 없었지만, 왠지 모르게 심신의 안정을 느꼈다. 요가 선생님의 목소리와 몸짓이, 그동안 잊고 살던 무언가를 떠올리게 해서였을까.       

어느덧 5년이 흘러, 매트 위에 설 때면, 이것으로 충분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굳었던 몸이 흐물흐물. 어떤 포켓몬으로든 변신할 수 있는 메타몽처럼, 매트 위에서는 고양이, 소, 개, 전갈, 코브라, 낙타, 물고기로, 얼마든지 자세를 바꿀 수 있다. 일평생 반려동물로 몸에 달고 다녔던 거북이와 새우는 하나둘 훌훌 떠나보냈다.   

그러던 2022년 봄, 처음으로 시르사아사나를 완성한 그 순간, 불현듯 깨달았다.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무언가를 사천 년 만에 찾은 것이다. 바로 이 순간이었다. 고대 인도 감옥에서 머리 위로 발끝을 쳐들었던, 갠지스강에서 세상을 거꾸로 보며 수행하던 기억이 오버랩됐다. 지난날의 고난과 방황, 그리고 오늘날 몸의 감옥에서 벗어나, 드디어 전생의 한을 풀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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