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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ㅁㅁㅁㅁ Sep 12. 2022

무해한 자유

처음으로 시르사아나사를 성공했다. 거스르는 발끝에 필사적인 의지가 실린다. 벽에 기대어서도 어딘가에 매달려서도 아닌 온전히 자기 힘으로 들어 올리는 행위이자, 타인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않고 무언가를 거스르는 자유. 요가 동작 하나에 의미 부여가 장황하다. 기어이 소감까지 말해야겠다.

“처음 요가할 때 제대로 되는 동작이 하나도 없었거든요. 그냥 매일같이 몸이 쑤시고 피곤해서 시작했어요.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있던 번데기 나부랭이가 장수풍뎅이가 될지, 나비가 될지, 무당벌레가 될지 어떻게 알았겠어요. 하다 보니 무엇이든 되네요. 살면서 뜻대로 할 수 있는 게 인간관계든, 일이든 별로 없잖아요. 노력한 만큼 나아지는 게 있긴 하네요. 같이 수련하는 회원분들과 매번 따뜻한 에너지 전해주시는 요가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계속할 수 있었고, 계속하는 것만으로도, 그전에는 겪지 못했던 어떤 순간이 언젠가 찾아온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5년 전 사회 초년생 시절을 떠올린다. 퇴근하고 집에 오면 누워서 쓸데없는 영상을 소비하는 것밖에는 남아있는 힘이 없었다. 힘이 없어서 누웠지만 누워있을수록 힘은 더 빠져나갔다. 한참 무기력하게 있다 보면 무기력이 지독하게 싫어지고, 그걸 알면서 벗어나지 못하는 자신도 싫어진다. 

어쩌면 그 ‘싫음’을 좋아했다. 오늘 이만큼의 고생을 했고 누군가를 위해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썼으니 집에 와서는 좋은 사람이길 그만두고 싶었다. 몸과 마음에 해롭지만 강한 자극을 느낄 수 있는 것들로 자신을 파괴하고 망쳐야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나쁨’을 누려야만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기껏해야 피자나 감자튀김, 떡볶이를 시켜 먹고 속이 더부룩한 불쾌감을 느끼는 것, 또는 조회수 높은 영상을 2배속으로 무분별하게 찾아보는 정도였다는 게 초라하지만, 어떠한 노력도 들지 않는 일탈은 드물기에, 그런 날들을 보냈었다. 그때 나를 일으켜준 건 요가였다.

일주일에 두세 번 요가원에 갔다. 어떻게든 예약한 시간에 몸을 이끌고 요가원에 들어가면, 그때부터는 요가 선생님의 마리오네트가 된다. 아무 생각 없이 선생님의 목소리에 몸을 맡기는 것이 오히려 가장 나다운 순간을 만들어줬다. 목소리와 몸과 호흡이 하나가 되면서 번데기의 허물이 벗겨졌다.

하루 동안 힘겹게 ‘좋음’을 쥐어 짜내느라 생긴 마음의 독이, 숨을 깊이 내쉬고 땀을 흘릴 때마다 사라지는 듯했다. 편안한 자세로 눈을 감으면 그 순간만큼은 온전히 나 자신이 된다. 행복했던 순간을 재생하기도 하고, 머릿속의 근심이 새로운 희망으로 바뀌기도 하며, 누군가에게 좋은 일을 해주고 싶어 지다가, 별안간 이루고 싶은 꿈이 생기기도 한다. 한참 공상을 떠다니다가 눈을 뜨면 정말 그런 삶을 살다 온 기분이 돼서, 실제로도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렇게 5년을 살아냈다.


매 순간의 심경을 바로바로 기록하지 않고는 못 배겨서 휴대폰 메모장에는 2017년도부터 1871개의 메모가 두서없이 남겨져 있다. 그중 139건의 메모에 “요가”라는 단어가 들어있다. “이제야 두통이 가시고 숨이 잘 쉬어진다. 살 것 같다.”, “어떤 힐링도 요가에는 못 미친다.”, “한 시간 동안 호흡을 느끼고 감각에 집중하며 꿈의 세계에 잠겨있다가 나온다.” 등 온통 요가를 찬양하는 문장이다. 요가는 나를 무기력의 수렁에서 건져 준 일상의 구원이자, ‘하면 된다’는 감각을 온몸으로 느끼게 해 준 희망이다.

요즘에는 일을 줄이고 시간이 많아지면서 매일 한두 시간씩 요가를 한다. 저건 기인 열전에 나오는 묘기야,라고 생각했던 동작을 하나씩 연습하고 있다. 언제까지나 힐링과 이완의 영역에 머무를 수도 있었던 요가 시간이 이제는 열정과 땀, 도전이 있는 가능성의 영역으로 확장되어 새로운 재미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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