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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다 Jul 03. 2022

5월 5일

언제나 쉬는 날인 사람에게는 공휴일이 전처럼 설레지 않지만, 오늘은 좀 다른 것 같았다. 오늘은 5월 5일이다. 늘 상 포트폴리오 준비로 카페에 갔다 집에 오는 날들의 반복이었고 오늘도 그렇게 보낼 수 있었지만, 다르게 보내기로 다짐했다. 그래서 목적 없는 산책을 떠났다.


나에게 5월은 행복이란 단어와 바꿔 쓸 수 있는 달이다. 5월이 왜 행복할까? 봄의 절정인 날씨 때문이기도 하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쉬는 날이 많은 달’이 각인된 게 큰 것 같다. 특별히 뭘 하지 않아도 평일에 학교를 안가는 건 신나고 행복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5월이라는 이유만으로 행복함을 느낀다. 지금은 맨날 공휴일이면서 말이다. 특별히 오늘은 더 그렇다. 지난 26년 동안의 5월 5일은 분명히 평소보다 더 행복했을 것이다. 어린이일때는 생일 다음으로 행복했을 것이고, 청소년일때는 학교를 쉬어서 그랬을 것이다. 작년 직장인일때는 주말 합쳐서 6일 동안이나 쉴 수 있어서 행복해 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올해의 오늘은 행복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는 게 조금 허전했다. 그러니 지금 이 목적 없는 산책을 확실히 즐겨야겠다고 생각했다.


5월에만 볼 수 있는 풍경이 있다. 거리마다 걸려있는 알록달록한 연등과 4월보다 더 짙어진 초록색의 잎 색깔이다. 내 행복했던 순간들의 배경이 되기도 하고, 이유가 되기도 했던 이 풍경을 보면서 걷다보니 5월마다 느꼈던 행복했던 감정들이 다시 떠올랐다.


나는 집 근처에 있는 공원에 도착했다. 놀이터에서 떠들고 있는 아이들과, 아기를 데리고 나와 앉아있는 가족들을 뒤로하고 벤치에 나무를 바라볼 수 있는 방향으로 앉았다. 그리고 아까부터 자꾸 생각났던 김동률의 ‘기억의 습작’을 틀었다. 노래가 시작되자마자 갑자기 바람과 잎이 노래에 맞춰 움직였다. 주변공기가 확 바뀌었다. 그저 따스하기만 했던 바람은 젊었던 사랑의 복기를 따스하게 바라보며 안아주는 바람이 되었고, 그냥 바람이 불어서 흔들리던 잎은 내가 느끼는 아련함을 몸으로 대신 표현하는 예술을 하고 있었다. 굳이 가사의 내용과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어도 그냥 이 곡은 지금 날씨와 공기와 너무 잘 어울렸다. 그래서 나는 가사의 감정을 느끼다, 음악이 주는 감정을 느끼다 하면서 나를 둘러싼 모든 것들을 가득히 받아들였다.


공원을 걸어 내려오면서 이런 분위기의 곡이 또 뭐가 있을까 생각했다. 이런 분위기라 함은 차분하고 아련한데 봄 같은 따스함이다. 그러다 언니네 이발관의 ‘100년동안의 진심’을 틀었다. 이 곡은 대학생 때 알게 된 곡도 아닌데 대학생 때의 봄이 아련하게 느껴졌다. 아마 가사가 내가 대학생 때 정말 진하게 느꼈던 감정을 표현해서 그런 것 같다. 음악도 그 가사를 너무 잘 표현하고 있다. 가사는 2문장이고 정확히 33초만 나오는데도 나머지 음악들이 계속 가사를 얘기하고 있는 것만 같다. ‘5월의 향기인줄만 알았는데, 넌 10월의 그리움이었어.’가사처럼 5월이 느껴지면서도 10월의 그리움도 느껴진다. 나는 그렇게 5월의 그리움을 느끼면서 더 걸어갔다.


걷다가 작은 노란색 꽃을 봤다. 봄이 되면 노란색 민들레가 꼭 누가 물감을 붓에 묻히고 걸어가다가 뚝 뚝 떨어뜨린 것처럼 피어있는 모습을 보곤 하는데 이 꽃은 그 민들레보다 조금 더 색이 연하고 작았다. 예뻐서 사진을 찍고 싶었다. 그래서 노래를 껐는데 어디서 김광석의 ‘사랑이라는 이유로’가 들렸다. 주변엔 아무도 없었고 조금 멀리 차 몇 대가 신호를 대기하고 있었다. 차에서 누가 크게 틀어놓은 건가? 차가 가까이 있는 게 아니라 웬만큼 크게 틀어놓지 않으면 여기까지 들리지 않을 것 같은데, 주변이 조용해서 들리는 걸까. 이런 저런 의문이 드는 와중에도 노래는 아련하게 배경음악처럼 들려왔다. 왠지 온 우주가 이 곡을 들으라고 하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사랑이라는 이유로’를 틀었다. 노래를 틀자마자 내 앞의 노란 꽃 풍경이 90년대 뮤직비디오 장면으로 변했다. 노래방의 자연영상 같기도 했다.


새로운 느낌이었다. 노래는 가을 밤 느낌인데 봄의 낮에 듣는데도 뭔가 묘하게 잘 어울렸다. 낮인데도 밤을 걷는 것 같았고, 밤에도 빛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낙엽이 떨어지는데 봄 햇살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행복은 상황과 상관없이 느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오늘을 돌아보며 말이다. 뭔가 행복의 종류 중에 ‘모순적인 행복’을 느낀 것 같았다. 아무 특별한 일이 없던 오늘이 행복했고, ‘기억의 습작’과 ‘100년동안의 진심’을 들으며 아픈 기억 덕분에 느낀 몰입이 행복했다. ‘사랑이라는 이유로’를 들으면서는 봄에 가을 감성을 맞으며 행복했다. 그렇다면 나는 행복을 느끼기 위한 환경을 만들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조금 더 행복을 잘 느낄 수 있도록 마음을 닦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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