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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살다 Aug 10. 2022

살아남기와 삶의 의미

한 해가 지날수록 책임의 무게가 커지고, 그것의 가짓수도 늘어나는데 그에 따르는 걱정 또한 그렇다. 사회초년생인 나의 걱정은 ‘일’이 많은 지분을 차지하고 있다. 이 일을 잘하고 있는지,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다른 일은 할 수 없을지. 걱정이 늘어 가다 보면 일상 속에서 무언가를 온전히 만끽하는 게 힘들어지는 것 같다. 걱정은 미래와 연결되어 있어서, 내일을 보느라 지금 이 순간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요즘 뭐하며 노냐는 질문이 조금 막막했다. 놀이는 그 활동에 몰입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제대로 논다는 것은 그 활동을 하면서 드는 생각이 한 가지여야 한다. ‘재밌다!’ 재밌는 그 순간만 바라보아야 한다. 그런데 나는 요즘 무슨 활동을 해도 ‘이걸로 돈을 창출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으로 이어진다.

그래도 찬찬히 하루를 되짚어 보니 그 순간에 몰입하고 있는 것들이 있었는데 바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


인테리어 보기. 남들이 꾸며 놓은 집, 특히 나와 취향이 같은 집을 보는 일은 정말 재밌는 일이다. 물론 가끔은 내 방을 꾸미기 위해 목적을 가지고 보긴 하지만, 대체로 그냥 재밌어서 본다. 어떤 목표나 의도 없이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일, 즉 쾌감이 목적이 되는 일은 강력한 몰입을 가져다주는 것 같다.     


유튜브 알고리즘 따라 음악 듣기. 일을 할 때 음악을 들을 수 있는 시간이 굉장히 많이 주어지는데 그 시간을 다 쓰기로 작정하면 하루 동안 엄청난 양의 음악을 들을 수 있다. 그렇게 두 달 정도만 지나도 내가 아는 음악은 거의 다 듣게 되기 때문에 알고리즘의 힘을 빌리는 경우가 많다. 새로운 땅에 들어서듯 처음 보는 이미지의 추천 영상을 누른다. 음악이 초창부터 좋다고 느껴지기는 힘들기 때문에, 중간에 다른 영상으로 갈아탈 때가 많지만 그래도 재밌는 시간이다. 때로는 다음 영상으로 랜덤 자동재생되게 했는데 내가 좋아하는 노래가 나왔을 때가 있다. 나는 알고리즘 여행 중에 그때가 가장 좋다.


버스 타고 가면서 창밖 보기. 회사에서 집으로 오는 시간 중 버스를 타는 시간은 40분 정도이다. 나는 버스 안에서 다른 것에 집중할 수 없어서 그냥 창 밖을 보게 되는데 그때 하루 중에서 가장 자유로움을 느낀다. 회사나 집은 주변에 끊임없이 내가 의식해야 되는 사람들이 있는데 버스 안에서는 덜 의식해도 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주로 앞자리에 앉기 때문에 이 공간에 사람들의 존재가 잘 느껴지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만 집중하게 된다. 해가 질 무렵이기 때문에 창 밖의 하늘과 햇빛은 아름다운 색은 마음이 아련해지게 한다. 그 풍경을 바라보면서 나의 마음속 깊은 생각들을 무작위로 끄집어낸다. 예쁜 색을 보는 것도 좋고 아무 생각을 늘어놓는 것도 좋다. 나는 그 활동에 완전히 몰입한다.  


한병철의 <리추얼의 종말>에서는 놀이를 이렇게 이야기한다. '놀이의 영광은 주권과 짝을 이룬다. 이때 주권이란 다름 아니라 필연과 목적과 유용성으로부터 자유로움을 의미한다.' 방금 필연과 목적과 유용성으로부터 자유로운 나의 놀이를 이야기했지만, 앞에서 이야기했듯 일에 대한 고민을 안고 사는 나는, 책에 따르면 전반적으로 성과에게 주권을 준 삶을 살고 있다. 사실 나만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인터넷과 책에는 살아남기 위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어느 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살아남는 것에 대해 쓴 글들을 보았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다라는 글이었는데, 갑자기 무언가 탁 걸렸다.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살아가고 있구나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때 어쩐지 '살아남기 위해 살아가기'라는 문장이 굉장히 어색하게 느껴졌다. 이 문장은 <리추얼의 종말>에 따르면 이렇게 풀어낼 수 도 있을 것이다.

'오늘날 삶이란 그저 생산하기일 따름이다. 모든 것이 놀이의 영역에서 생산의 영역으로 옮겨 간다. 우리는 모두 노동자이며 더는 놀이꾼이 아니다. 놀이 자체도 여가활동으로 약화된다. 오직 약한 놀이만 용인된다. 이제 놀이는 생산의 내부에 속한 기능적 요소다. 놀이의 신성한 진지함은 노동과 생산의 세속적인 진지함에 완전히 밀려났다. 건강과 최적화와 성과의 독재에 굴종하는 삶은 한낱 생존과 다를 바 없다. 그 삶은 어떤 찬란함도, 어떤 주권도 어떤 집약성(강렬함)도 없다. 로마의 풍자 시인 유베날리스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매우 적적하게 표현했다. "삶에 머물기 위하여 삶의 의미를 포기하기"'


살아남기 위해 사는 것을 부정적으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또 그렇게 살고 있는 사람들을 비판하고 싶지도 않다. 일단 내가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으로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상황과 처지를 매우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아주 어릴 때부터 '살아남기 위해' 살아온 것 같다. 대표적으로 학생의 신분으로 해온 공부가 그렇다. 국어나 음악, 미술 같은 경우에는 공부하는 시간이 행복하게 느껴졌지만 대부분의 과목들은 평균 이상이 되어 보통의 범주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했다. 기본적인 상식을 갖춘 사람이 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수준이 있는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그래서 세상에서 보통의 범주 안에 드는 사람이 되어 살아남기 위해, 낙오자가 되지 않기 위해 부단히 공부했던 것 같다.

그러니 학생의 신분에서 벗어나도 살아남기 위해 살아가는 것은 어색하지가 않다. 특히나 지난 몇 년 간 취업준비생부터 사회초년생까지의 신분을 갖고 있는 나는 더 그렇다. 내가 사회생활 한 10년 차가 돼서 사회초년생의 신분을 벗어나면 달라질까? 주변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을 것 같다. 가정을 책임지고 아이를 책임지는 부모의 신분을 가진 사람이나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사람들도 '살아남기'에 치열히 임하는 모습은 당연하게 볼 수 있다.

노인이 되면 달라질까? 주변에 노년에 접어든 분들을 생각해보니 그런 사람도 있고 아닌 사람도 있는 것 같다. 내가 아는 노년의 살아남기 위해 살지 않는 분을 떠올려보면, 그분은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는 건 아니다. 그런데 그분은 그것이 삶의 최우선이 아니다. 산책을 하며 보는 자연을 만끽하고, 얼마 남지 않은 친구들과의 만남을 만끽하시는 것을 그분 삶의 최우선으로 두신다. 어쩌면 노년에 접어들었기 때문에 가능한 삶의 태도일지도 모르겠지만 그분의 삶의 태도는 '살아남기 위해 살아가기'에 대한 의문에 힌트를 준다.


사실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 세상에 던져진 이상 살아가려면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특히나 전쟁 속에서 사는 사람이나, 경제적 상황이 매우 어려운 사람이나, 심각한 우울증을 갖고 있는 사람이나, 학대나 왕따의 상처를 갖고 있는 사람 같은 극한적 상황에 놓인 사람들 앞에 서면 나는 아무 말도 못 할 것이다. 그 사람들 앞에서 어떻게 '살아남기 위해 살아가기'라는 문장에 의문이 든다고 말할 수 있을까. 때로는 그렇게 살아남는 노력을 하는 것이 최우선이 되어야 할 때가 있다. 그것을 최우선으로 두고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것이다. 하지만 그런 상황에서 벗어났다면 이제 살아남는 것을 넘어선 삶의 태도를 가져야 할 것 같다. '삶에 머물기 위하여 삶의 의미를 포기'하는 삶을 살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집을 정리하다가 어릴 적 너무 예뻐서 쓰지 못하고 보관해 둔 볼펜을 발견한 적이 있다. 오래되서 나오지 않는 볼펜을 보며 후회스러웠다. 생각해보면 이거 쓰면서 자주 행복하려고 산 거였는데 아낀다고 뒀다가 그 행복은 누리지 못하고 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살아남기 위해 사는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 그 삶은 쓰지 못한채 보관만 되어있는 볼펜과도 같다. 우리는 의미있게 살며 누리라고 이 땅에 보내졌기 때문이다. 이제 신이 주신 볼펜을 갖고 글도 쓰고 그림도 그릴 것이다. 볼펜의 그립감과 빛깔과 쓸때 느껴지는 부드러움과 색상에 감탄하며 볼펜을 누릴 것이다. 매일매일 볼펜의 아름다움에 감탄하며 행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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