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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회재 Jul 04. 2024

모르겠고 도망가자

(출1~18)

(...) 이집트로부터 멀어지고 있다. 무리 가운데에서 불기둥을 손을 번갈아 들며 함께 걷는다. 피곤하고 가슴이 답답하다. 이른 저녁 운 좋게 잠자리에 들었지만 전차 구르고 칼방패 부딪치는 소리에 깨어 다시 잠들기까지 한참을 더 걸어야만 했다. 겨우 잘 곳을 찾아 몸을 뉘이고 솜으로 귀를 틀어막은 채로 실컷 욕을 뱉고 나서야 다시 살금 잠들 수 있었는데 꿈에 찾아온 것은 하나님의 천사가 아니라 집 앞에 양반다리로 굳게 앉아 있는, 그런데 목이 뒤로 180도 돌아간 아주머니 귀신이었다. 나는 그 귀신이 귀신이 아니라 사람인 것을 미리 상정해 둔 바람에 나를 놀래키고 벌벌 떨게 할 귀신이 되지 못한 아주머니는 당신의 딸과 함께 어느덧 전신주 위에 걸터앉아 나와 마주 보며 이야기를 하기에 이르렀다. 다만 그들의 말은 새벽녘 가느다란 새소리처럼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다.


성경을 덮는 데까지 얼마나 걸리게 될까. 어쩌다 보니 성경 읽기를 통해 흐트러진 삶을 다시금 모아가는 모양새다. 내 삶의 수많은 어쩌다 보니는 예견된 것들처럼 느껴진다. 유전자란 그렇게 터무니가 없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성경이 연명의 수단이 될 줄은 몰랐다. 무언갈 읽더라도 나에게는 부러 읽고 싶어 사두었던 박경리 선생의 장편소설도 있고 그게 아니더라도 시간쯤이야 매정하게 보내버릴 수단은 많이 있다. 그 모든 것들에 그러나 끌림이 없다. 그럴 때가 있지의 때는 때가 소나기처럼 삶을 세로로 잘라줄 때나 가능한 얘기다. 나는 무엇엔가, 어디엔가, 돌이킬 수 없는 수평선이 그어져 버렸음을 느낀다.


새벽 네시 반. 오늘도 이름 모를 새가 입을 벌려 새날을 알린다. 새의 정체를 알고 싶어 우리나라의 새소리들을 찾아봤는데 닮은 소리가 없어서 직접 이름을 짓기로 한다. 성경의 인물들은 갓 태어난 자식이 얼마나 예쁜지, 또 어떻게 자라길 바라는지 따위의 의미로 이름을 짓지 않는다. 그저 아이가 태어난 순간의 경황과 감정 등이 녀석의 이름이 된다. 자식이 나와 구분된 존재가 아닌 나의 순간임과 동시에 일상적인 사건이자 삶의 거듭인 것이다. 그런 김에 훌쩍 '네시반'이라고 새소리에다 이름을 붙여버리고 말았다.


아침이 되도록 안개가 걷히지 않는다. 안개는 밤을 인도하는 수많은 불기둥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무리에서 빠져나와 축축한 돌 위에 털썩 앉았다. 저기 모세와 그를 따르는 무리 전체를 하나의 인간으로 보아도 틀림이 없다. 그에게 오랫동안 고통을 주었던 이집트 생활, 마찬가지로 작금의 사회에서 탈출한 다음은 무엇인가. 거대한 인간이 때때로 배가 고프고 목이 마를 때마다 차라리 고통받더라도 원래 자리에서 배부르게 먹고 마시는 게 이보다 나았다고 불평한다. 동시에 또 다른 얼굴이 튀어나와 이럴 바에야 거기서 죽었어야 했다고 말한다. 나는 앉아 있던 바위를 흔들어 깨운다. 하얀 컵 속에 물이 차오르고 그의 입술 사이로 구름기둥이 연이어 피어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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