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하는 담배

by 자진유리




히스기야 왕은 다윗을 본받아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옳은 일을 하였고 그의 아들 므낫세는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악을 행했다고 적혔다. 좋고 나쁨의 역사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가운데 한 사람의 인생 가운데에도 여호와는 좋았다가 나빴다가 한다. 나빴던 여름에 읽기 시작한 성경은 이제 겨우 676쪽에 머물러있다. 예정대로라면 통독을 마쳤어야 할 시점인데 반도 못 왔다.


평안에 이르게 되면, 또는 고통의 점도가 견딜만치 묽어졌다 싶으면 그것을 가능케 한 행위들의 빈도는 점차 줄어들다가 아예 사라져 버린다. 그러면서 차츰 외부의 유혹에 빠진다. 눈을 감고 배꼽에 집중하는 동안 나는 서귀포와 제주시를 잇는 평화로를 운전하고 있었다. 계기판은 100km/h를 가리키고 있었고 도로가 권장하는 속도와도 꼭 맞았다. 그 지경에 미치자 뻑뻑한 가속페달은 부드럽고 가벼워졌고 나아가기 위한 엑셀러레이터는 거의 밟지 않아도 되었다. 그 모습이 도로의 이름처럼 평화롭고도 보기 좋았다. 운전자의 얼굴도 환해 보였다. 힘을 거의 쓰지 않으면서도 절로 옳은 길로 굴러가는 삶. 엑셀과 브레이크 모두 밟지 않아도 되는 삶. 그 삶으로 전환되었음을 알아채는 순간. 그 순간은 마치 하나님의 품에 듦과 같고 온 우주가 돕는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와 비슷하다.


평안, 또는 권장속도에 미치면 그렇다는 것을 부디 알아채야 한다. 모르고 가속페달을 계속 밟을 때 사람이 고장 난다. 난폭해지고 질서를 어지럽히다가 흔히 말하는 번아웃 따위의 상태로 튕겨져 나간다. 번아웃은 100에서 줄어든 0이 아니라 100을 초과해 도로 밖으로 튕겨져 나간 전혀 다른 0이다.


한편 100이라는 상태에 다다랐을 때 이 길이 쭉 이어질 거라 착각한다거나 자만해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떠올리지 못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면 상태는 차츰 줄어드는 0을 향하게 된다. 줄어드는 와중에도 무지하고 오만해서 그럴 때가 있지 쯤으로 착각한다. 그런 무책임한 말을 내뱉고 싶지 않다면 가능한 매일 스스로를 점검해야 한다. 나와 가까워질수록 그럴 때가 있지, 얼마나 가겠어 따위 말은 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무지를 믿는 말은 안 하게 될 것이다. 저 힘들 때만, 또 저를 위할 때만 신을 구하는 어리석고 비양심적인 짓은 못하게 될 것이다.


100에 다다르기까지 대부분의 인간은 악을 연료로 삼는다. 그것이 불가피하고도 당연한 수순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악이 아니더라도 100에 이르는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초사이어인이 되는 힘의 근원이 카카로트의 그것인지 베지터의 그것인지만 놓고 비교해 봐도 알 수 있다. 실컷 악을 행하고 나서야 축적된 악으로 선을 발휘하는 위선자들은 모두 경직된 힘을 계발하고 단련해 왔다. 경직된 힘은 눈만 감아보아도 알 수 있다. 빛의 스펙트럼은 힘을 가할수록 어둠을 향한다. 경직된 힘은 시전자의 힘의 근원이 욕망, 분노, 두려움 따위의 속성이기 때문에 또한 더욱 커다란 욕망과 두려움을 향할 수밖에 없다. 반대로 이완을 인내하는 방향, 나는 그것이 자연스러운 힘이자 추구해야 할 방향이라고 믿는데 그것은 점차 밝고 따뜻한 색을 향하다가 이윽고 투명해진다. 차갑고 경직된 힘을 견디는 방향에서 투명에 다다라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모두 이 귀한 삶으로 헛짓거리나 하고 있다는 생각에 암담해지곤 했다.


오랜만에 명상을 하면서 느낀 어지러운 감상이었다.

그동안 너무 안 했다.

그동안 나를 너무 몰라줘서 힘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들숨에 감사, 날숨에 사랑이라지.

사랑 되지 못한 감사는 무지와 자만으로 굳어짐을 잊지 말게나.







튕겨져 나간 자리에서, 텅 빈 하루를 시작하는 법을 몰라 묵상과 명상을 시작했다. 일기를 적어나가기 시작했고 기성의 운동법을 내 몸에 맞는 스트레칭과 체조로 고쳐 만들었다. 운명처럼 다가왔던 커피는 새 아침을 향기롭게 했다. 오늘날 말씀과 찬송이 더해지니 이 아침이 조촐한 예배가 된다. 찬송이라니. 말씀을 읽는 중에 부쩍 찬양하는 이야기가 잦아지자 문뜩 그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에 미쳤나 보다. 나도 제사장들처럼 연주하고 노래하길 좋아하는데 성경은 꾸역꾸역 읽으면서 왜 찬송가는 한 번도 펼쳐볼 생각을 못했는지. 그토록 신기한 노래가 없지. 누가 불러도 아름다운. 낯설어 보여도 본래 누구나 다 알고 있는 듯 다음 발자국으로 성큼 옮겨주시는...... 나의 예배는 짧은 감사기도로 시작되어 찬송을 부르고, 찬송가 뒤에 교독문이 딸려 있길래 괜히 한 소절 읊고, 말씀을 세 장 정도 넘기고, 말씀으로부터 하고 싶은 말이 생기면 설교문처럼 적고, 그렇지 않으면 은퇴목사의 책을 10분 정도 읽는다. 그다음 찬송을 한 장 더 부르고 축도 같은 전인류적 기도로 순서를 마친다. 내가 봐도 엉뚱하고 어이없는 이 짓거리는 내 삶에 산란하게 흩어져 있던, 또 잊었던 것들이 한 데 모아진 모습일 뿐이었다. 한 데 모이자 관통하는 하나의 의미가 생겼다. 창조의 아침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예배라는 이름이 되고 다시 삶, 사랑, 그 무엇이든 된다. 되어서 이로우면 진실력이 강해지고 사용하기에 따라 통치력도 된다. 그러니 통제 불가한 거대한 힘에 떠밀려 갈지라도 그런 줄로 알고 깨어 있어야 한다. 흐름을 예감할 줄 알아야 하고 때로는 거스를 수 있는 힘이자 확고한 믿음도 필요하다. 그 힘으로 담배를 끊겠다는 얘기가 몹시도 길었다.


~주는 나의 보배~

~참 기쁨의 근원~


감사하구나.

이 아침 풍요로워서.

놀라운 햇살 닿지 않는 곳 없어 찬송을 부른다.


찬송을 더했으니 담배는 뺄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담배 문 날숨은 사랑도 아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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